익숙한 것이 주는 안정감.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이 지겹지는 않니." 엄마가 했던 가장 쓸쓸한 말이 아니었나 싶다. 미안해. 아직 지겹지 않아서. 지겹지 않을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을 엄마가 굳이 말로 꺼내야 했던 그 마음을, 난 이미 감지한다. 새로운 것만을 보는 일이 어떤 습격이 되면, 익숙한 것이 주는 안정감이 그리워지면 난 조금 더 어른에 가까운 인간이 되겠지. 어렸을 때 서울에 가끔 가면, 지하철 손잡이를 잡지 않고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서울 사람들은 이렇구나' 생각했는데.
넘어짐보다도 소매치기를 조심해야 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고서 포르투갈 행을 결심한 건 맞으나, 영화의 감동과 다르게 긴장이 우선하니 참 야속한 일. 시끌벅적한 건너편의 소란도 짐작이 간다. 한 푼이 아쉬워 가이드를 자청한 마당이지만 동갑의 여자 둘을 에스코트하는 일이 쉽진 않다. 그녀들에게서 나오는 문제가 아니라 그녀들을 지켜보는 녀석들의 문제. 남자였다면 신경이 덜 쓰였을 텐데와 같은 가정은 집어치우고 자리를 뜬다.
도시를 흐르는 강 건너로 가는 유람선이 푼돈이라는 건 장기 체류자에게 큰 낙이었다. 2층 규모의 거대한 선박이지만 움직임은 재빠르다. 바쁘게 선점한 창가에 앉아 숨을 돌리며 휴대폰을 보니 문자가 한 통 도착해 있다. 아버지 생신. 아이고 정 없는 동생아.
된장찌개, 김치찌개, 순대, 떡볶이.
그녀들은 먹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보다 아직 치즈와 파스타, 진한 커피가 더 좋았다고 해두자. 조용한 잔디밭에서 강을 따라 펼쳐진 야경을 보며 마시는 맥주가 좋은 건 반박의 여지가 없다. 로맨스가 꿈틀거려도 괜찮을 자리인데 이미 나를 제외하고, 그녀들은 한국에서의 지난 로맨스가 있다. 달이 뜨고, 잽을 날리다 기회를 엿본 강바람이 어퍼컷을 날리자 우린 일어났다.
마지막 배는 사람이 없었다. 잔뜩 취해 창가 자리를 잡을 여력도 없었지만 배는 텅 비어, 요란하게 가방을 내려놓아 본다. 그녀들은 살고 싶다고 했다.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자동차 경적이 울리지 않는 거리로 나와 산책을 하고, 골목의 시장으로 가 단골 가게에서 장을 좀 보다가.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가지고 무덥지 않은 여름의 강가에서 목을 축이고 싶다고.
비뚤어진 성격이 갑작스러운 그녀들의 로망에 물을 끼얹는다. 그래서 먹고 싶은 음식들은. 한국 음식이 그리워지면. 그녀들은 내 반응에 놀란 건지 빤히 바라본다. 아니면 가족이라던가. 뒤에 덧붙인 말에 진지해지지 말라며 웃음을. 이미 이런 일을 수 없이 겪었지만 오늘 난 취했고, 집요했다.
드디어 새로운 것이 지겨워진 건가. 모든 새로움이 지긋지긋해져서. 슬리퍼 끌고 나가도 되는 우리 동네 골목길이나, 서울에 살던 집 앞 편의점. 길목에 나를 잘 따르는 고양이 따위가 생각날 건 뭐람. 갈피를 잃은 마음을 다독이지 못하면 나의 여행은 끝장이다. 이쯤 하고 불 붙은 가슴을 진화해야 하지만 강바람이 거세다.
못난 입이 사실 오늘, 아버지 생신이라고 말한다. 바쁜 농사철에 아버지는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기도 했고 어머니는 쓰러진 적이 한 번. 내가 비어있는 동안 들려오는 소식들 사이에, 부모님의 생신은 각각 두 번째를 맞았다. 하루 종일 그 생각을 하다 결국 시간이 지나 버리는 건,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모르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죄책감에 입을 다물고 있기만 하는 것인가.
"이렇게 하자." 그녀들은 갑자기 옷 매무새를 고쳐주고 물을 한 모금 먹이더니 촬영을 시작한다. 이 어느 시절 영상 편지냐. 새빨갛게 취해서는. 어색하게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에 방금까지 요란하던 내가 야속하다.
어... 아버지.
난 아직 김치찌개가 그립지는 않다. 내일쯤 그리울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래도 김치찌개만 먹으며 사는 삶은 정중히 사양하겠다. 난생처음으로 보낸 영상편지에 게스트하우스에서 이불을 걷어차야 했으나 인터넷은 우편처럼 일주일이나 걸리진 않는다. 날씨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대화가 어색한 아버지와 아들, 두 남자의 세계에서 사랑한다는 말로 끝나는 영상 편지는 다시없을 테지만, 어느 방향으로도 멈춰 있지 않은 물 위에서의 고백은 김치찌개 같은 그리움이었다.
다시 배낭을 싼다. 익숙한 것이 주는 안정감을 더 그리워하기 위하여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는 일. 그러나 다짐은 정반대로. 결코 어느 것에도 익숙해지지 않으리라. 더 이상, 더 많은 것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하여.
새로운 나를 본다. 공항으로 가는 길.
어느 새 난 지하철 손잡이를 잡지 않고 서 있네.
조심스럽게 손잡이에 손을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