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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Mar 01. 2018

지독한 편리

다시 불편을 향하여.


바닥에 짐을 베고 누워있다. 티켓을 받았으니 면세구역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짐을 부치지 못해 기다려야 했다. 진작 들어갈 수 있는 떠날 사람들의 공간에 가지 못하고 내 짐이 떠날 시간을 기다려 준다. 벽을 기대 누운 너절한 자세가 길게도 간다. 티켓을 미리 주며 머리 벗겨진 남자는 말했다. 다섯 시에 와. 혹여 못 알아 들었을까 긴 손가락을 쫙 펼치며 다시 한번 말했다. 다섯 시. 그때 짐만 붙이면 돼.


배낭 안에는 이것저것 든 물건이 8킬로그램이었다. 왜 티켓을 먼저 준 걸까. 어차피 들어가지도 못할 몸이 짐에 묶이는 시간 내내 같은 물음이 맴돈다. 나라 두 개를 연달아 건너온 몸이 피로에 지쳐 묻는다. 저 짐이 과연 필요한지. '그럼!'이라 곧장 대답할 수가 없다. 짐에는 내 미련도 무게에 얹혀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내가 섬기는 삶의 부분을 가진 사람이 많아지면서 공교롭게 아는 사람이 겹칠 때, 두터운 친분을 과시하는 일이 늘었다. 만나게 된 날부터 모든 역사를 읊는 날 보면 당사자가 까무러칠 정도로. 나는 추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늘 하룻밤을 새고 뒤늦게야 찾아왔다. 타인의 성취를 빌려 몸을 부풀리는 것만큼 고약한 게 있을까. 괴상한 모습이었다. 여행이며 공예, 음악, 높은 학벌. 하물며 인터넷에서 유명한 사람들을 안다는 게 자랑으로 쓰이는 일이.


팔에 알 수 없는 문신을 잔뜩 걸친 남자가 옆에 있었다. 걸리지 않을까요. 위탁 수하물을 추가하지 않은 걸 의미하는 질문에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아마 걸리겠죠. 그가 가진 짐에 대하여 어떤 권한도 없는 내가 할 말은 별 게 없었다. 가방에 든 과자를 먹는 이대로라면 내 배낭의 무게는 더 줄어들 것이라는 사실 밖에.


사람 없는 바닥에서 뒹굴거리다 다섯 시에 꼭 맞춰 카운터로 향했다. 껌을 쩍쩍 소리 내 씹는 남자가 막아선다. 붙잡고 어디를 가느냐 묻는다. 짐만 붙이러 왔어 티켓은 있거든. 안 돼 시간이 아직이야. 꼭 다섯 시에 오라고 했는데? 안 돼.


묵직한 배낭을 둘러업고 도로 계단을 오를 자신이 없어 카운터 건너에 주저앉았다. 남자는 나를 쳐다보며 껌을 쩍쩍 씹었고 어떻게 하면 저런 큰 소리를 낼 수 있는가 신기해할 따름이었다. 사람들은 복작복작 줄을 채웠고 껌 씹는 남자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잡지 않았다.


바쁜 와중에 나와 눈이 마주친 건 일전의 머리 벗겨진 남자였다. 사람들을 제치고 다가오기에 살짝 손을 들어 신호했다. 너 왜 여기에 있어? 저 남자가 아직 시간 안 됐대. 껌 씹는 남자는 날 모른 체 한다. 스킨헤드의 남자가 슬쩍 돌아보고는 걱정 말고 따라오라 말했다. 그를 뒤따라 모두를 앞질러 직원 곁에 설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30초가 되지 않았다.



타인이 가진 권력을 빌리는 건 적어도 내겐 부끄러운 일이다. 월급을 받고 일하는 얼마의 시간, 일개 말단 직원이 가질 수 있는 권한은 많지 않아서 직접 상급자를 찾아 나서는 이들을 종종 볼 때 치미는 넌덜머리가 어떤 것인 줄 잘 안다. 융통성이나 붙임성이라 일컫지 않기 위하여 챙기는 부끄러움은 아직 잊은 적 없다.


껌 씹던 남자가 젓는 고개를 보고도 민머리 남자를 따라 딛는 걸음이 어려워 휘청거린다. 포기하지 못하고 누리려는 편안함은 이렇게 한 번으로 그치지 않을 것을 아니까. 그동안 봐 왔던 사람들의 갑질은 그래서였을까. 조르고 요구하길 그치지 않는다면 얻을 수 있다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믿음으로 타인의 마음을 피곤토록 괴롭히는 걸까.


나는 지독한 편리에서 벗어나 그 공백을 불편으로 메울 수 있을 것인가. 빠르고 편하고. 그 맛을 알게 된 지금의 내가 도로 불편을 향해 돌아갈 기운이 있을는지. 위탁 수화물을 추가하지 않아 초조해하던 남자는 추가 요금을 내지 않으려 건너편에서 실랑이하고 있었다. 오늘도 빈 터 같은 삶을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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