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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an 26. 2018

삶의 굴곡이 질감처럼

뿌리 깊은 나무.


남반구에서만 보이는 남십자성을 찾으려 밤하늘을 훑었다. 오랜만이고 여태 그 자리인 별 몇 개가 반가워 찬 바람 견디고 한참을 있었다. 밤에 세차게 불던 바람이 새벽엔 깊이 죽었다. 노령의 여주인이 맞아주는 숙소의 처음은 마음에 쏙 들어 남은 여행의 시간을 모두 쓰겠노라 선언했다. 어차피 있는 거 짬짬이 일이나 해보지 않겠냐는 주인의 제안도 한몫했다.


운영하는 식당에 오는 사람들은 더러 무례했고 그녀가 20년가량 살아온 타국의 삶은 반 푼 어치의 값으로 여겨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다분히 공격적인 그 어떤 뾰족한 말도 쉬이 흘려버리는 대답, 우아한 말씨에서 느껴지는 공손함은 곁에 두고 배운다 하여 얻기 힘든 것이었다.



바닥에서 잔다는 건 왠지 모를 아늑함이 있지요.


바닥을 데우는 일이 생소한 문화가 되는 나라에서 온돌을 꾸리는 건 얼마나 힘에 부칠까. 사람들은 자리를 펴고 이불을 덮었다. 밑으로부터 오는 온기를 맞는 건 그녀의 섬세함에서 비롯된 그리움이었다. 오래도록 지내며 하루에 하는 운동이란 집 안의 얕은 오르막을 오고 가는 일과 더불어 먼 가게에 들려 장을 봐서는 끼니를 꾸려 먹는 일이 전부였으나 그것도 고되어 몰아서 하곤 했다.


잠깐 건너가는 이들은 나를 꾸준히 물었고 지겹도록 같은 대답을 해야 했다. 이전에 경험했던 것들과 오래도록 식객 살이 할 남자의 소식을 호기심 삼아 찾아오는 사람들은 이 대륙의 범죄 하는 도시를 묻고, 지금 선 곳도 그와 같은가 물었다. 후자가 목적인 질문에서 전자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했고 대화의 끝은 기껏 여기까지 와서 허투루 쓰는 나의 시간을 책망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나의 풋내가 지겨워 울었다.


알고 있다. 여행하며 삶을 지탱하는 사람은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해 보인다. 여행이 삶의 범주에 들지 못하고 끝 언저리를 배회하는 이들에겐 그렇다. 덧칠된 인내와 내적 성장을 목표로 겨냥하여 다니는 사람들. 수도 없이 배울 것 투성이었던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여주인과 마당을 걸었다. 포플러 나무의 새싹은 생명력이 너무 옅어 눈에 띄지 않았다. 물을 하루에 한 번쯤 충분히 주라는 말을 붙이며 손으로는 듬성듬성 자라난 잡초를 뽑았다. 잡초는 죽지도 않고 자라, 잘 자라라는 나무는 멋대로 죽어버리는데. 사람도 그렇잖아. 아무리 물을 주고 응원해줘도 하기 싫은 사람은 어쩌지 못한다. 말을 물가에 대어 놓는다고 물을 먹일 수는 없는 건 시시콜콜 들어 알고 있지 않은가.


아마 이 나무는 나보다도 오래 자랄 거야.


그 말에 눈길 닿는 그녀의 주름과 굽은 등과 말갛게 뜬 살갗의 피부와 짧은 검버섯. 그러나 죽음을 이토록 멀리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삶의 굴곡이 질감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죽은 나무를 제치고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나무들을 손짓하여 알려주고 산 것들이 내 키를 넘어 자라 그 언젠가 해를 쉽게 가릴 수 있을 때. 나는 그녀가 뿌린 삶을 증명하리라.


그녀가 아이처럼 말하는, 이 땅의 겨울이 사랑스러운 날씨를 데려온다던. 바람 잠잠하니 찬 기운 힘 못 쓰는 겨울에. 포플러 뿌리는 더없이 내리고 단단해질 것이다. 자신이 내린 단단한 삶의 뿌리처럼.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서 나무는 자랐다. 어느 지나가던 이의 한 마디 말로 일순 짧아진 20년의 세월은 흔들리지 않는다. 쓰러질 듯 뒷짐 지고 먼저 가는 여인의 모습이 있다.


어떤 삶도 쉽게 가벼워져선 안 된다.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일지라도.


다시 바람은 곁을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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