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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Apr 16. 2019

강산은 절반쯤 변했네

바다도 그랬을 거다.


 공짜 영화 티켓을 받았다. 서울극장까지 가야 해서 이왕 공짜표를 얻은 것, 돈을 더 쓰지 말자는 맘으로 걸었다. 신촌역을 지나 아현, 충정로, 시청에 도착하니 여기저기 시끌벅적했다. 길이 막히고 사람만 지나다닐 수 있게 되자 버스는 오도 가도 못하는 꼴이 되었다. 걸어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집회가 있었다. 국기가 무수한 걸로 보아 이미 나락까지 떨어진 태극기 집회가 분명했다. 같이 걷기도 곤란한데 그렇다고 우회하자니 너무 돌아가야 했다. 사람으로 보이는 것들이 ‘영원한 대통령 박근혜’라 적힌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어쩐지 속이 끓어 휴대폰을 켜서 집회 현황을 찾아보았다. 광화문 광장에서도 집회가 있었다. 곧 4월 16일이었고 벌써 5년이 지났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던데 그럼 지금 딱 절반쯤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 매주 무궁화호를 타고 광화문으로 오던 날이 짤막한 기억으로 스쳤다.

 서울극장을 가는 길은 아니었는데 난 홀린 듯 광화문을 향했다. 경찰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인도를 따라 길을 막았고, 그 편에 익숙한 것 같았다. 차를 막느니 사람을 막는 일은 다툼을 피하기에 가장 효율적이었으니까. 적은 인원으로 피해를 막는 일, 그 효율은 우리의 삶에 어떤 결과를 내었던가. 그저 한 뼘일지라도 그간 변화하였는가.





 최근에는 속초에 산불이 터졌다. 영화라고 믿고 싶었고 영화라고 불러야 하는 일이었다. 갇힌 사람과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이 화마의 손아귀에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모든 일이 끝난 뒤에 할 일만 가까스로 알고 있었다. 새카맣게 탄 숲은 벌목된 가리왕산을 떠오르게 했다. 없어지는 것들에도 못 쓰는 손이 없애는 일에 쓰였을 때, 적잖이 분노했다. 없어지는 것들을 피하는 일조차 이리 어려운데 잠자코 지켜보는 마음은 얼마나 고통인가.

 바다도 그랬을 거다. 팽목항은 이미 소설에 나오는 어느 가상의 지명처럼 마음을 떠돈다. 그곳으로부터 정지한 삶을 본다. 가 본 사람, 가지 않은 사람, 알기만 아는 사람.(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잠깐이라도 거길 바라보며 ‘아 정말 위태롭다.’ 느끼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을까. 머리칼이 쭈뼛서고 마음이 콩닥거리는 것뿐 아니라 ‘저건 영화지, 영화여야 하지.’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가끔은 있더라. 지겨우니 그만하라고? 네 삶이 흐른다 해서 멈춰진 이를 나무라진 말아라.





 그래서 나는 행렬을 적당히 물리고 들어가려다가 경찰에게 잡혔다. 횡단보도인데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은 신호도 마땅히 없어야 하는 게 아니냐, 따지는 사람이 많았다. 마찰이 있을까 봐 염려하는 그들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만 나는 노란 깃발 쪽으로 걷고 싶은데. 팔찌를 보여주고 가방의 리본을 보여주고, 나는 친구가 있다는 말까지 동원해 스크럼을 건넜다. 나는 저곳의 편입니다. 속마음을 내보였다.

 친구는 활기차게 달리며 무리를 이끌었다. 노란 우산 든 행렬이 플래시몹을 선보인다고 무대에서 알렸다. 방송국은 앞다투어 셔터를 눌렀고 줄지어 걷는 사람들은 공중에서 보면 리본으로 보였다. 나를 발견한 친구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느냐 물었고 나는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을 만큼 어려운 길이었나, 되짚어 보았다. “오는데 힘들었어.” 왜 힘들었던 거지. 막아서거나 막혔거나 했던 일들이 우리에게 있었다. 언제나 가림막뿐이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잠시 듣다가 다시 길을 떠나며 광화문대로로 나섰을 때 태극기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길을 막는 경찰들이 아직 있기에 나는 인사동으로 넘어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경찰은 재빠르게 길을 터서 나를 인사동으로 배출했다. 쌈지길까지 걷는 동안 무수히 많은 관광객,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과 저마다의 깃발을 든 가이드가 사람들을 인도했다. 평화로웠다. 무엇이 지켜지고 있고 무엇이 평화인지 더는 알지 못할 것처럼 걸었다. 서울극장은 참 그대로일테니까. 종로의 금강제화를, 낙원상가를, 을지로를 향해 걸어야 했다. 5년이 흘렀고 강산은 절반쯤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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