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먹고, 잘 자고.
오래 만난 사람이었다. 험한 꼴 보이며 지내온 탓에 서로를 지키던 낮은 허울마저 사라진 기분이 들 때면 당분간 내외하자고 농담 같은 약속도 종종하곤 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이라,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난 최소의 거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자주 보이던 얼굴이 당장 눈 앞에서 사라지자 쓸쓸함이나 불안도 있었지만 더없이 좋아진 세상에서 원할 때마다 휴대폰으로 얼굴 정도는 쉽게 보았다.
지키지 않을 말을 뱉고 험한 꼴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힘들다는 모습을 자주 보이기에 일을 그만두고 내 가까운 곳으로 오는 건 어떠냐 했더니 쉽게 말하는 것 아니라 했다. 난 확실히 타인보다 쉽게 이것저것을 던져두는 성격이기도 했다.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서 결론을 함부로 내는 일도 자주 있었다. 고민이나 걱정을 쌓아두고 살지 않는 탓에 가진 것 없었지만 잃을 것도 없이 살아온 시간은 죄다 길쭉길쭉했다. 곳간에 쌓아둔 고민을 끼고 사는 삶은 잘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도로 당신을 만난 건 오랜만이었다. 이런저런 고비를 겪으면서도 색을 잃지 않던 눈에 총기가 사라진 걸 보았을 때, 나는 조금 더 진지하게 지금 힘든 일들을 내려놓아도 좋다 했다. 너는 집에 머무는 내내 먹고, 잤다. 당신의 행동에 토를 달지 않고 내버려 두었는데 휴가로 도망 온 동안 당신이 하는 일이 그뿐이었다는 것은 평소 먹고, 자는 일이 쉽지 않은 탓이었다. 충분히 쉬고 나서 여기저기 아픈 곳을 말하는데 몽땅 마음으로 비롯된 병이라 내가 고칠 재간이 없었다.
어려운 순간에 부딪힐 때마다 끙끙 앓으면서도 잘못을 자기 속에서 찾는 당신에게 병이 없을 리 없었다. 자신에게 벼락을 자주 던지는 탓에 마음 자락 한편이 타기도 바짝 탔을 것이다. 잠자코 앉아 듣다 보면, 정작 상처 준 사람은 오지 않고 상처받은 사람만 자기 잘못인 줄 착각해 병원에 온다던 어느 의사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밥때도 불규칙하고 잠도 마찬가지여서 너는 군살이 조금 쪘다고 했다. 직장인들이 배가 나오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건강을 잃고 돈을 얻었는데 어째서 둘 다 얻길 원하는 건 욕심이 되는지 모르겠다며 사는 게 어려운 일 투성이라 했다. 미래는 자주 모습을 감추었다. 다시 어딘가 소속되기 위해 일련의 과정을 겪는 모습을 상상하노라면 몸서리를 치게 된다고, 그렇게 스스로 만족해버리고 나면 더 해줄 말이 없었다. 돈 벌어 나중에 병 고치며 살게 되면 그 또한 무슨 소용이냐 했지만 내가 겪어 깨달은 것들은 누구에게 빌려줄 수도 없는 것이었다.
돌아가는 날 버스를 타고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연이은 신경전 탓에 내내 신경이 곤두선채로 버틴 모양이었다. 킥킥거리는 소리에 깨어보니 곤히 잠든 와중에도 당신 손을 놓지 않는 날 보고 모습이 우스운 탓이라 했다. 이런 게 힘든 하루를 견디게 하는 연료라면서 말하곤 떠났다.
모르는 새에 건넨 기운 센 위로가 홀로 아는 체 하던 수백 마디 말보다 값졌다. 단단한 근육으로 똘똘 뭉친 몸이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남루하고 연약한 정신 한두 군데 없는 사람도 찾기 쉽지 않다. 군살 없이 뼈로 세상을 살기란 터무니없으니, 세상에 널브러져 있는 온갖 쓸데없는 군살들 덕에 우린 비집고 들어갈 틈마저 있다 믿어야지.
또 언젠가 옆에는 골몰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맞고 틀리고 없는 선택지 속에 여기 옳은 결정이 있다며 그의 손에 꼭 쥐어준다한들 그의 몸 곳곳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걱정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스스로 마음과 열심히 다투다가 어느 결론이든 만족할 수 있는 선에서 결정하는 그 무게는 아무래도 남다르다. 나는 여기서 하루나 이틀의 분량을 고작 보고 또 누가 속상해하는 일을 안고 왔을 때 잘 먹이고 잘 재워줄 것이다.
빨래는 기특하게 잘 말랐다. 빈 바닥에 당신이 지내며 쓴 수건 몇 벌을 널어 개키다가 이틀 전 다녀간 당신의 고민을 잘 보았다. 고민은 빨래보다도 느리게 마르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괜찮다. 시간이 지나 여태 같은 고민으로 씨름하고 있다면 잘 마른 수건을 쌓아두고 다시 며칠 오래도록 함께 있자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