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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Feb 03. 2018

단단하고 청결한 용기

그러므로 사랑은 최선이다.


뒷마당에 굴러다니는 빨간색 플라스틱 바가지가 있다. 아주 오래되어 칠도 다 벗겨진 작은 것에 쓰인 글씨가 눈에 든다. '단단하고 청결한 용기.' 그 용기가 내가 생각하는 용기가 아니라는 것쯤 이제 알지만 그땐 몰랐다. 무엇을 담는 의미로의 물건에게 꼭 다른 의미로 필요했던 부족함을 떠올렸다. 그 얼마나 절실했던 용기이기에 이런 착각을 할 수 있는가.


삶에 용기가 필요한 일은 수두룩했다. 학급 아이들의 오해와 착각을 거닐며 하루를 연명하는 것은 고되어 다 놓아버리고 싶을 적도 많았다. 태어나 주먹질을 처음 했던 날 부모님은 날 혼내지 않았다. 말없이 중국집으로 가 짜장면을 먹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특별한 날을 빼곤 먹지 않던 음식에 잘못도 잊고 그릇에 코를 박고 먹었다.



뚫린 입이라고 뱉던 말들이 용기가 아닌 줄 알게 된 건, 보다 우아하게 상황을 해결하는 사람으로부터였다.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가 뿜는 빛은 너무 눈부셨고 그런 사람들은 화를 내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았다. 그걸 깨닫기 전의 시간을 살던 난 지레 겁에 질려 날카롭게 과잉 방어하는 날이 잦았다. 나의 상처가 타인에게 상처 줄 구실은 결코 될 수 없었는데도.



사람들은 모두 나를 미워하기 위해 태어났다

어설픈 지론으로 가시처럼 살던 나는 문득 깨닫는다. 세상은 나에게 그리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여태 어느 곳을 향해 칼날을 들이댔던가.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방향 잃은 분노가 허무히 사라져 무덤으로 돌아갔다. 내 꼴은 혼자 팔을 붕붕 휘두르다 말고 눈치를 보는 일이었으나 이미 곁에는 아무도 없는 빈자리뿐이었다.


어쩌면 마음에 들지 않는 하루에게 했던 말들이 많다. 예상한 것들이 통 들어맞지 않았을 때, 작은 바람에도 휘둘리는 가을일 때, 어떤 이유인지 모르게 멀어진 사람들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를 때, 그리고 아무 잘못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나를 싫어하는 것에는 늘 나의 잘못이 있다고 여겼는데 사실 나를 싫어했던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조금이라도 기분이 상한 듯 보이면 자존심에 되려 사과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는 내가.



두 눈 멀쩡히 뜨고 앞에 보이는 최선 대신 차선을 택하는 일은 많지 않다. 사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에겐 최선이었던 선택들이 몰고 온 지금을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는 게 아닐까. 그러니 꾸짖음은 뒤로 미루고 당장의 최선을 고민해야 할 때 아닌가.



마침내 더 이상 어리다고 변명할 수 없는 나이가 왔다. 수많은 변명거리 중 하나가 더 사라진 셈이다. 세계는 여전히 내게 관심이 없고 외사랑을 계속하기에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삶을 지탱하기에 사랑만 한 게 없다. 그러므로 최선이다.


사람은 마음대로 더디게 걸을 수 없을 때 삐딱하게 걷는다. 더디게 걷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삐딱한 걸음걸이가 저도 모르게 익숙해지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에서 더딘 것과 삐딱한 것이 결코 잘못이 되어선 안 된다. 우린 어느 정도 칠이 벗겨진 채 살지 않는가.


삐딱한 걸음의 난 더는 플라스틱 바가지에서 용기를 찾지 않고 구태여 짜장면 한 그릇에서 위로를 구하지 않는다. 간신히 찾아낸 용기와 위로가 단단하고 청결한지는 여전히 모르겠고. 다만 잘 살기 위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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