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를 구하러 온 사람들.
댄, 분노에 대해 생각을 하면 분노만 생각하게 될 거야. 걷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들어. 하루에 30km를 걷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40km 그 이상을 걸어내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곤 걷는 것 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잘 모르게 되거든. 그래서 무리를 하는거지. 스스로가 얼마나 걸을 수 있는지 짐작하지 못 하면서 걷다보니 마음까지 끌어다 쓰게 되는 우리의 지금들. 서로를 헤아리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화가 역류할거야. 여기에 왜 온 걸까. 이 길이 뭐라고 걷는걸까. 그래서 의미를 못 느끼고 자신에게 절망하기 싫어서 차라리 중단하는 게 편한 지점이 오고 말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내려는 이유는 제각기 다르겠지만 하고 났을 때는 어떨까. 스스로가 부여한 역경과 고난을 거치는 게 나를 변화시킬까?
나는 사람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봤어. 줄곧 성난 사람들, 예의 없는 자들, 온갖 인간 군상들에 대해. 그들은 모두 슬퍼서 온 거야. 기쁨과 환희를 위해 돌진하려고 슬픔 외에 존재하지 않는 길을 걷기로 선택한 거야. 어쩌면 일 주일, 또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니? 저녁이 되면 사람들은 피자 한 조각이나 다름없는 작은 거실에 모여서 술을 한 잔씩 해. 물론 절대 취하지는 않아. 다시 새벽이 오고 해가 일어서면 함께 일어나야 하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면서도 하는 이야기는 다 똑같아. 불안. 삶에 대한 불안과 용서. 누구에게 갈구하는건지 나는 잘 모르겠어. 다만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되풀이 해. 보듬어 주기를 바라면서. 어찌 보자면 그 작은 거실은 내가 느끼기에 슬픔의 장터나 다름 없어보여. 서로의 슬픔을 비견하기보다는 내게 있는 상처와 슬픔을 널어두고 들어주며 물물교환을 하는거야. 그러고 나면 상대의 이야기를 조금씩 나눠 들고, 나의 이야기는 다른 이들이 나눠 들어주고. 그래서 그 무게는 같은가 하면 같지 않을지 몰라. 술을 따라 마시다보면 방울이 온전히 남아가지 않듯 흘리거나 쏟거나 컵에 묻거나 하며 떨쳐져 나가잖아.
불안정함 밖에 없는 것도 이해해. 서로가 서로에게 신이었던 시간이 될 테지만 신도 코를 고는가, 신도 새벽에 시끄럽게 구는가, 신도 폐를 끼치는가. 사람은 자기가 뭘 하는지 잘 몰라. 안 그랬다고 생각하는 게 더 편하게 만들어졌으니까. 자신은 온화하다고 선하다고 정상의 범주에 두는 게 습성이라서 잘못에 대한 인식을 하면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게 돼. 그러나 여기가 어떤 길인지 우린 알잖니. 어떤 것에나 용서를 구하러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댄, 네가 신이라는 걸 기억해. 적어도 넌 나에게 신이었어. 탈수 증상으로 탈진에 가까워질 때 네가 나눠준 약간의 물과 쿠키가 나를 살렸다는 걸 난 알아. 그리고 걷는 길이 언제나 같지 않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는 언젠가 그 시절 나의 처지와 비슷한 사람을 마주하면 거리낌없이 내가 가진 물과 쿠키를 건넬 용기가 생겼어. 나는 어디에서도 용서를 받을 필요가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을거야. 스스로에게 생성되는 부끄러움은 차치하고 용서는 용서할 자에게 받을 것이지, 이따위 길을 걷는다고 무슨 용서를 받겠나 싶었거든. 종이가 점점 빽빽해지도록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다보면 모두가 용서를 이야기하는 시절이었지만 정작 원하는 건 용기였을지도 몰라. 댄, 중단하지 말자. 멈추지 말자. 걸어야 할 길이 아득해도 용기를 얻는 것보다는 확연히 짧은 길이니까 우린 해낼 수 있어.
@b__a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