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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Oct 19. 2022

받는 사람

엽서를 띄우다.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체력이 남아도는 건 아니었다. 남다르게 잘 걷는 편도 아니거니와 그렇다고 못 걷는 편도 아니었지만,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만큼 익숙한 일이 없어서 습관처럼 한계를 살짝씩 넘겼다. 그러면 어딘가 나라는 인간의 너비가 넓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체력 사이에서 내게 짬이 생기면 좋아하는 사람들을 떠올리기로 약속했다. 오늘 하루도 수고하셨습니다. 아무나에게 안부를 건네기에는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은 이상 어려웠으나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집에 왔을 때 불이 꺼진 차가운 방에 들어간 기분은 느끼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 마음은 어떻게 해야하는 게 맞을지 생각하며 한참 마당을 서성였다. 물집은 없었지만 발이 욱신거렸다.


    편지를 쓸까. 아니다. 엽서다. 엽서를 띄우자. 편지봉투에는 받는 사람 말고도 보내는 사람의 주소를 적어야만 한다. 나는 돌려받고 싶은 게 아니야. 종종 다른 나라에서도 엽서를 쓰면 없어지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엽서를 ‘띄운다’고 표현하는걸까. 닿으면 좋고 닿지 않아도 괜찮을 마음을 띄워 보내는 게 인류 최후의 낭만 같이 여겨져서 정확히 ‘엽서’라고 정했다. 수많은 기념품 가게를 다니며 조악한 기념품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엽서만 봤다. 지역의 특색을 잘 드러내는 엽서부터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를 오래된 엽서까지. 그리고 자그마한 종이에 띄울 심정을 담아 쓴다. 심경이 복잡하여 깨알같은 글씨로 한정된 공간 안에 모든 걸 담으려 애쓴 날도, 단순명료하여 한 문장으로 담아내는 날도 있다.



    할 말이 채워지고나면 우표를 붙이고 소인을 찍는데, 또 이마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다. 개성가득한 소인들과 우표의 형태들. 진중한 이야기를 썼는데 우표가 우스꽝스러우면 참, 내용조차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그리하여 다시 머나먼 이국 땅으로 여정이 시작되는 한 뼘의 종이를 우체통에 넣고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길을 걷는다. 여정에 올라타 흘러가는 사람의 역할 그대로. 그리고 엽서는 엽서의 역할대로 각자의 길로 갈 것이다.


    어제의 서러움은 어제 보냈고 오늘의 가여움은 오늘 보냈으니 내일 올 행복은 내일 보낼 것이다. 요즘의 나는 용기와 불안과 사랑에 대해 진득하게 생각한다. 그런다고 결론이 나는 이야기라면 다음 엽서는 영영 없을 것이나 이런 생각이 어찌 쉽게 정리가 되던가. 영원히 글을 쓸 수 있을 빌미가 된다. 친구들에게 하나, 둘, 셋 그때의 마음들이 도달하면 나는 그나마 생각의 나무에 몇 걸음 더 올라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엽서의 여행을 상상해본다. 그만큼이나 가슴 속 낭만이 낭낭하게 여행을 하고 있는지 톺아볼 수 있는 좋은 계기로 작용하는 10분 남짓의 시간을. 수신인만 적을 수 있는 무한한 편도의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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