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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Oct 06. 2015

백수의 긍지

이제는 익숙한 당신들에게.


난 스무 해가 넘도록 내 인생에 결정권이 없었다. 고등학교도 내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했고 대학을 진학하지 않겠다는 말에 부모님과의 힘겨루기에서도 어김없이 지고 말았다. 고등학교 시절의 끝무렵, 그제야  인생을  결정하라고 말하는 것이 무책임해 생각에 잠겼을 . 선생님과 부모님이 다시   재촉해대는 통에 나는 결국 원서를 냈다. 난생 처음 보는 낯선 과의 이름이 잔뜩 적힌 커다란 대학 입시 관련 종이가 이어 붙인 책상들 위로 나뒹굴고 그마저도 아이들이 바글바글 모여 그야말로 난장판, 이것이 3 마지막 교실이었다


갑작스레 내동댕이 쳐졌던 사회에선  그리 달갑지  않아했고 어느 영화에서처럼 깊은 구덩이로  발길질당하는 느낌이었으니 나는    만큼만 무책임해지기로 했다. 맞지 않는 학교를 일 년 만에 관두고 군대까지 착실히 다녀온 , 여권을 새로 만들었다. 한동안은 ’소리 나며 찍히는 스탬프가  좋았던 건지 세상 구경을 대충  느낌도 사뭇 든다.


이것은 반란의 시작이었다.


인생사 운칠기삼이라는데 하물며 역마살까지 두른 나는 거칠 것이 없었다.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은 가난했기에 먹고 싶은 것은 마음껏 누리지 못했으나 그때그때 느껴지는 감정을 그대로 누렸다. 자신에게 충실한 삶은 얼마나 충만함을 주는지. 말 잘 듣던 장남의 일탈은 부모에게 큰 걱정으로 다가왔지만 삶의 주도권이 내게로 넘어왔을 뿐, 나는 그대로였다.


페루 쿠스코, 숙소의 옥상.


쿠스코에 며칠 째 머무르며 쉬는데 연락이 왔다. 얼마 전까지 여행을 같이 하던 형이 부탁하길, 쿠스코에 있을 자신의 친구를 만나서 익숙지 않은 여행에 말동무나 해달라고 하기에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여자는 나에게  “스물셋?”  마디를 던졌다. 한국인. 희게 탈색한 머리에 뽀글거리는 파마까지 했으니 나의 몰골은 충분히 흥미로웠겠지만 신기한 것을 봤다는 눈에, 처음 보는 사람의 밑도 끝도 없는 반말이 불쾌해  “perdón?” 일부러 스페인어를 던졌다. 한국 사람이 아닌가 보다 하며 그녀 다른 자리로 가 앉아힐끔힐끔  쳐다보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만나야 하는 남자 애석하게도  여자와 일행이었다. 남자는 내게 다가와 연락을 받았다며 인사를 했고 우리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합석을 했다.  “스물넷.” 내가 이전의 질문에 대답을 하자 여자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짓고 다음 질문을 한다.


대학교는 어디며 여행 자금은 어디서 났는지, 맛집은 어디에 있고 버스 예약을 부탁해도 되는지.

나는 그 의례적인 취조와 강요에   바를 몰라 아무 대답도 없이 차를 후루룩 마셔야 했다.


여자는 완벽한 스트라이커였다. 말에 막힘이 없었고 말 끝마다 조목조목 공격적인 어투를 사용했다. 과시적이었으며 정신을 차릴 수 없게 질문을 퍼부었다. 학교를 관두고 사진을 공부한다는 나의 말에 그럼 백수네?”하며 몸을 뒤로 젖히고 눈을 내리깔았는데, 이겼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훈련된 골키퍼였으니검투사처럼 짐짓 자세를 고쳐 잡고 이제부터 시작할 말을 머리로 다듬었다.


“그러는 당신은?”

되묻는 말에 여자는 다리를 꼬며,

“나는 직장을 잠시 관두고 온 거지.”


“그럼 백수네?” 말을 마치고 나는 차를    마셨다.




욕을 뱉으며 가버린 여자 대신 남자가 사과를 했던  같다. 여자가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 너와 달라, 백수입니다 하고 패배한 표정을 지어라. 곱게 눈을 내리깔란 말이야.' 이런 것이었나. 내가 단지 고졸이어서? 아니면 불만스러운 태도를 보여서? 신기한 원숭이 노릇을 해주지 못해서? 그렇게 해서 그녀가 얻는 것이 무엇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기에 더 이상 생각지 않기로 했다. 부모님 말대로 고운 시선을 받았던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세상 사람 모두가 비난의 눈길을 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나는, 백수냐는 물음에 사진을 배운다고뻔히 무시당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던. 그 시절 내가 가지고 있던 긍지에 경의를 표한다. 비난을 목적으로 다가오는 얄팍하고 익숙한 패턴의 당신들에게 휘둘리지 않을 백수의 긍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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