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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Oct 07. 2015

깊이 있는 사이

일곱 번의 이사.


돌을 던졌고 새가 맞았다.

나는 돌아올 수 없는 늪으로 낙하하는 기분이었다.




어린이집이라는 이름이 새로 생길 당시에 엄마는 높은 교육열인지, 형편이 괜찮아서인지 모를 이유로 동생과 나를 한꺼번에 어린이집에 보냈다. 낯선 세상에서 만난 또래의 친구들과 친해지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렸으나, 곧잘 지냈다. 소풍을 가던 날, 나를 포함해 모두가 싸온 유부초밥을 보고 ‘소풍에는 유부초밥을 싸 오는 거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반장의 엄마가 왜 선생님들의 도시락까지 싸온 것인지는 의문이었으나 이내 잊어버렸다.



금융위기가 닥쳤다. 알파벳만 배우고 처음으로 접한 단어가 ‘IMF’였던 것은 텔레비전이 너무나도 흔히 그 글자를 띄웠기 때문일까. 국민학교의 간판을 떼어버리고 초등학교를 달고 있던 모습이 입학하던 학교의 첫인상이었는데, 교실에서 자기소개를 마치고 전학을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빠르게 난 전학을 했다. ‘학교를 잘못 들어온 건가?’ 그렇게 세 번 더 학교를 옮기고 나는, 나의 소개가 익숙해졌다.


인도, 조드푸르 (2014)


난 내성적인 아이가 되어 누구와도 깊이 있는 사이가 되기 힘들었다. 아버지는 집에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엄마는 자주 울었다. 이삿짐은 포장을 뜯지 않은 채 놓여있었고 그 시절 이삿짐센터를 운영하던 고모부는 값비싼 차를 타고 가끔 방문했으나 이사를 할 때만큼은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차가운 건물 대신 산과 개울이 보이는 동네에 와서야 엄마는 짐을 풀었다.


학교는 작았다. 사투리를 쓴다고 별반 다를 것도 없이 서울 말씨의 전학생은 흥미로운 장난감이었을 테지만 소심함은 새침함정도로, 조용함은 과묵함으로 포장되었으니 꽤 즐거운 시절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들판에서 돌을 멀리 던지고 놀다가 날아가던 새를 맞춘 건 고의로 하기에도 어려운 일이었다. 작디작은 콩새 한 마리가 수직으로 낙하하고, 차라리 아무도 못 보았다면 다시 한 번 던진다고 말했을 텐데. 아이들은 이미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같이 놀던 두 살 많은 형이 차분히 걸어가 새를 찾아서는 벙어리장갑에 넣어왔다. 새는 날개에 살짝 상처가 있었지만 건강했고, 나를 향해 서려있던 시선들은 그제야 사라졌다.


아직 날수 없는 새를 선생님께 보이고 교실의 새장에 잠시 기르기로 했으나 새를 볼 때면 그 시선들에 사로잡혀 괴로워했다. 잔인했던 시선의 무게는 컸고, 악몽과 한 이불을 덮었다.


가을소풍에서 김밥을 싸 온 아이들의 도시락 사이로 샛노란 유부초밥은 적잖이 튀었고, 좀 더 철이 든 아이들에게는 내가 그저 도시 얌생이로 보일 뿐이었다. 결국 적응에 실패한 내가 다시 학교를 옮기고, 몇 해가 더 지나서 뒤늦게 마음이 단단해졌을 때, 옷을 홀랑 벗고 다 같이 멱을 감는 등의 추억을 공유할 사이는 남아있지 않았.


잘못한 것도, 잘못된 것도 없었으나 아픔은 사방에 널려있었다. 미처 원망을 부릴 틈도 없이 집안은 축축했고 소란이 가득했다. 그 시절, 분명 우리 가족은 힘든 시기를 관통하고 있었다.


한 때, 사장이라 불리던 남자는 술 주정을 부리고 있었고 사모님은 시골 아줌마가 되었다.

그러나 도시락엔 유부초밥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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