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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Dec 23. 2015

국경의 밤

경계를 넘었다는 느낌이 드는 그 순간.


국경을 넘는다는 일은 어쩐지 초여름날의 매미와 같아서 나는 낯설고 만다. 경계선을 거침없이 지나는 국경의 기차와 시도 때도 없이 검문을 요구하는 국경의 버스, 국경이 어디인지조차 모를 야간의 이동수단을 볼 때면 차라리 비행기로 넘는 국경이 확실해 보이기까지 하는 바람에.





비행기에서


경계를 넘었다는 느낌이 드는 그 순간, 지이잉 하는 떨림의 옆자리엔 식어버린 맥주가 그 뿐이다. 연신 들이키는 손이 무색하게, 우스울 정도로 몸에 맞지 않는 맥주가 얼굴을 발갛게 달구고 영혼을 흔든다. 국경에서 일으키는 어떤 강력한 힘이 빠른 속도로 몸을 먼저 보낼 때, 분명 영혼이 한 걸음 늦는 것.


맥주는 필요할 때가 고작이다. 세지 않은 알코올에 손 끝까지 전해지는 두근거림은 살아있다는 느낌이 필요할 때 필요했다.


밤에게 도망쳐 해를 쫓은 기체에 기어코 오늘이 밝는다. 쉼 없이 돌아가는 모터 소리에 빨려 옮겨지는 사이에 승무원은 입국신고서를 두 장이나 건넸다. 옆자리에 잠든 남자와 일행일 것이라는 그 착각은, 내가 그의 최신 스마트폰을 오천 피트 상공에서 조심스레 납치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착각.


몸집이 큰 서양인이 작은 저가항공사의 좌석에 몸을 구겨 넣는 일만큼 자연스럽게, 나는 자연스러울 수 있다. 돈 많은 사람, 돈 없는 사람, 어른, 아이, 동양인, 서양인. 다를 바 없이 지정된 시트 넘버 48D에서.



기차에서


경계를 넘었다는 느낌이 드는 그 순간, 반짝 눈을 뜨고 만다. 새어 들어오는 모래에, 먼지에, 모기까지 나타났으니 여기는 전과 다른 곳이라는 짐작. 나는 몸을 추스르고 짐을 살핀다. 짐작에 응답하는 듯, 세찬 경적 소리에 정신이 쏜살같이 돌아와 어두운 새벽.


문은 열리고 짐은 무사하고, 모래와 먼지와 모기는  온데간데없이 다시 번쩍. 어떤 제한 없이 넘는 유럽의 국경에 잠깐 벼락처럼 혼선된 신호를 받는다. 사막을 넘는 기차에서 따라오지 못했던 나의 영혼은 잠시 유럽의 나에게 왔다가 반짝 사라졌다.


움찔하는 나에게 신문을 보던 남자는 뜬금없이 포장된 핫도그를 내밀며, "어쩌다 이렇게 여행을 힘들게 하느냐 묻지 않을게요. 그러니 먹어요." 번쩍하는 순간의 꼬르륵 소리가 새삼 컸다. 뚱뚱한 그 남자에게 나의 영역을 지켜내느라 한심했던 내가 얄궂게도.


무엇보다도 다른 여행자를 비웃지 않는 연습을 해야겠다. 굳이 남의 여행을 판단하지 않는 연습을 해야만 한다. 나는 그 여행에 훼방꾼이 되기 위하여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콜라는 없어요. 당신의 고단한 여행 스타일을 존중하니까요." 음료가 없다는 말에 조금 천천히 음식을 삼키며.




버스에서


경계를 넘었다는 느낌이 드는 그 순간, 차는 멈춘다. 제복 입은 사람 몇이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짐을 쑤시다가 개인 심사를 받을 때는 한껏 움츠러든다. 겁이 나는 걸까. 겁이 나도록 만들어서일까. 여자 속옷까지 들춰보는 통에 고개를 숙이니 죄인과 같다.


얼씨구, 차까지 고장 나 국경에서 밤을 맞는다. 이상하리만치 정확한 국경에  한쪽 나라의 통신사가 국경에서 딱 끊기는 것을 확인하며 노는 치들도 있고, 지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분노도 듣고, 수프까지 끓이며 저녁 먹을 준비를 하는 아주머니들과 그 곁을 벗어나 별을 구경하는 나도 있다.


넓은 평야에서 고립되어 있다니 날 선 경험에 몸 둘 바를 모르다가, 코 앞에서 여전히 경계를 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우스움이랄까. 실소를 해버리는 것이다. 이미 침낭을 펴서 누운 이들의 곁에 나도 한 줄 몸을 비빈다.





그 언젠가 걸어서 국경을 넘는 순간, 치열하게 짐을 검사하는 그 옆으로. 여유롭게 양을 몰고 지나는 여성을 본 순간. 그 밤은 설명할 길이 없다. 반입 금지된 물품이 너무 많아 도장을 찍어주니마니 하는 실랑이와 작게 돌덩이를 엉겨 지은 문을 국경으로 삼아 놓은 것을 아랑곳없이.


분방하게 누비는 아낙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는, 어느 한 곳에 소속된. 소속을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언쟁을 벌이던 우리만의 왁자한 그 국경의 밤을.


그저 그 여성은 집에 돌아가 밥을 짓고 아이와 남편의 입에 음식을 밀어 넣은 뒤 고단한 잠을 이룰 것이라는 것. 단지 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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