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의 역사

덤프트럭 다이어리.

by 박하



사포 같은 수염은 살이 여리던 내게 아팠다. 아버지는 내가 울어버리고 나서야 볼에 더 이상 수염을 문대지 않았고, 때문이었는지 주가 지나 다시 만난 수염은 술냄새가 조금 났어도 아프진 않았다. 아버지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러낸 것이다.


눈을 뜰 때마다 다른 곳에서 깨어난다는 것은,
책가방도 없던 아이에겐 엄청난 일이었다.


아버지는 덤프기사였다. 아버지는 동이 트기 , 엄마 품을 벗어나지 못하던 동생을 깨우지 않게 조심히 나를 안아 미리 데워 덤프트럭의 간이 침대에 눕혔다. 늦잠이 당연했던 아들은 때때로 오후에 일어나, 벌써 번째 모래를 싣던 안에 우두커니 있기도 했다. 모든 도시가 바쁘도록 새로운 것들을 짓던 시대, 아버지가 지금껏 내비게이션을 쓰지 않는 이유는 방방곡곡을 누비던 그때의 기록이었음이 분명하다.


불을 지핀 드럼통에서 타는 나무를 보며 모래 담는 포클레인 소리를 듣는 것은 분명, 나이의 내겐 조금 이른 감정이었다. 하나 같이 험상궃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꼬마에게 사내들은 보기와 달리 수줍게도 사탕과 과자를 건넸다. 종종 너무나 매운 후라보노 껌을 주는 아저씨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좋아했기에 선심을 건네기도 했던 같다.


서울에서 출발한 차는 부산, 광주, 여수, 통영. 그리고 밀양, 영월, 당진, 목포에 이르기까지 생소한 목적지로 흩어졌다. 매번 들리던 휴게소에서 아버지와 식사를 때면 가락국수를 먹었는데 아침을 먹을 즈음의 시곗바늘은 망향휴게소에서 멈췄고, 아버지는 역시나 가락국수가 가장 낫다며 것도 똑같이 주문하곤 했다.


'가락국수' 대신 자리를 차지한 '우동'이란 이름이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졸음쉼터가 곳곳에 있는 지금과 달리 휴게소 진입로까지 길게 주차되어 있던 트럭들과 쪽잠을 들기 , 뒤차의 기사들과 담배를 태우던 아버지의 모습은 이상 낯선 것이 아니었다. 번은 아버지가 시간만 자고 가자기에 싸구려 손목시계의 알람을 맞췄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일어나지 못했고 눈을 떴을 아버지의 덤프는 다시 달리고 있었다.


바다의 해안도로를 달릴 때면 눈이 부셔 고개를 돌리고 싶다가도 그럴 없는 풍경에 취하기도했고,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는 조선소 내부의 컨테이너가 가득 쌓인 옆을 걷거나 벚꽃이 날리는 대관령을 넘을 , 그것이 충분치 않았나 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감동의 역치가 점점 커져 무엇을 보아도 시큰둥한, 경험을 바라는 나이가 되었다. 무럭무럭 자라 온 역마의 역사가 찬란할 지경으로.




스무 해나 단련된 역마살이 모두 아버지의 탓이라고 말하기 전에, 새벽 같이 일을 나가 아들 얼굴조차 보기 힘든 아버지의 최선이었으며, 당시 삼천 원이던 가락국수의 배나 하던 어린이 돈가스 세트를 사줄 여력이 없는 당신이 가락국수 어묵 점을 아들에게 덜어주는 미안함이었고, 조악한 장난감 시계의 작은 알람 소리에 잠을 깨야만 했던 아버지의 책임이었음을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고작 스물일곱의 아버지는 험악한 사내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염을 길러내고, 묻는 나이 대신 다섯 아들이 있다고 말해야 했음을. 이해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