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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Jan 15. 2016

심야 백화점

마네킹과 잠드는 사람들.


내 위치를 확인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나는 납득하지 못할 것이 없었고 소심하게 아닌 척 하기엔 남아 있는 올해가 너무 선명했기 때문이었다. 일을 시작한 것은 큰 고민 없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바로 전, 일을 관둔 스튜디오와 얼마 멀지 않은 곳이었다.




좋았다. 일을 지원한 동기나, 포부 같은 것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글자를 적기에 다소 좁다고 느껴지는 빽빽한 칸을 다 채우지 못하고 곳곳이 빈, 구멍 난 이력서 이외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던 계약은 너무도 쉽게 이루어졌다. 나는 그렇게 백화점의 야간 경비원이 되었다.


전에 쓰던 사람의 이름은 김혁수였구나. 머리가 닿을 듯 낮은 천장에 가득 찬 캐비닛 중 하나를 가리키며, 반장은 잔소리로 느껴질 정도의 부담스러운 설명을 이어간다. 김혁수라는 사람이 얼마나 일을 못 하는 사람이었는지, 내가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의 무능력을 설명하며 간간이 안약을 넣는다. 특별히 아프지 않은데도, 반장은 눈곱이 많이 생길 만큼 많이 늙었다.


젊은 사람이 많았던 그 사실이 의외였던 건, 나의 편견이었는지 취업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 때문인지 가늠이 어려웠다. 경력이나 연륜을 높이 살 만큼 복잡한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 오히려 까다로웠던 모두의 성격을 납득할만한 이유가 됐다. 사소한 것으로 트집을 잡느라 애쓰던 야비한 노인들과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던 치사한 젊은이들이.


'경비' 대신 '보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라고 했다. 나이에 상관없이 같은 말을 한 것은 아마 이것 뿐이었다. 경비라고 하면 우습게 본다며, 이유를 붙였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 단어를 우습게 봤던 건 일하는 사람들 스스로였거나 혹은 자랑스럽게 말할 수 없던 스스로의 자격지심이 아니었을까.




거의 모두, 시급에 근접한 담배를 피웠다. 심심풀이로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하나같이 꽤 사치스러웠고, 그만큼 급여는 얄팍했다. 불 꺼진 백화점에서 온갖 명품이 여전히 빛나 보였던 것은, 비상등 때문도 아니었고 충전기가 고장 나 충전이 잘 되지 않은 나의 작은 손전등 때문도 아니었다. 이름만 알고 평소엔 구경할 일도 없는 값비싼 명품은 꽤 유심히 살피던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여성용 브랜드를 눈길조차 주지 않고 건너뛰어버린 것을 보면.


열다섯 개의 드넓은 층을 꼼꼼히 살피는 것은 등에 몇 줄기의 땀이 흠뻑 흐르는 일이었다. 비상문을 열었을 때 어제와 달리 옮겨진 마네킹이 문 앞에 서 있거나 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모든 순찰 순서를 외우고, 비상문의 위치까지 전부 파악하고, 홀로 순찰에 나갈 수준이 되고 나서야 나는 놀라서 소리를 지른 뒤 오는 놀림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지새울 새벽은 길었다. 사람이 와글 하던 백화점은 차분히, 또 조용해졌고 자신의 순찰 순서가 끝나고 잠시 쉴 때면 컵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우거나 편의점의 삼각김밥 따위로 배를 채우는 것이다. 함께 밤을 새우는 편의점의 여자 아이를 먼저 꼬시는 것이나 아무도 듣지 않는 드넓은 옥상 헬기장에서 힘껏 노래를 불러보는 것이 젊은이들의 시시한 놀이였고 신문과 TV는 노인들의 몫이었다.




담배는 절대 피우지 말고. 반장은 8층의 여직원 휴게실을 배정해주었다. 4층은 넓어서 반장이 머물렀고, 7층은 조용하여 다른 늙은 사람이. 9층은 소파가 푹신하여 또 다른 젊은 사람이. 번갈아 가며 잠을 자는 경비원들은 모두가 퇴근한, 남는 마네킹을 밤사이 빼곡하게 보관하는 여직원 휴게실에서 쪽잠에 든다.


옷이 걸쳐지지 않은 네다섯 개의 마네킹들이 기괴한 자세로 서 있는 작은 방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뒤돌아 누워 잠을 청한다. 여전히 와글와글한 느낌의 심야 백화점에서.


두 시간 후면 집에 갈 수 있겠구나. 그리고 모두가 출근하는 모습을 보며 퇴근을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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