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섯 살까지 엄마가 의사인 줄로만 알았다.
엄마, 나 아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차라리 나았다. 아프다고 말할 수 없는 지경에도, 엄마는 쉽게 나를 병원에 보내지 않았다. 작은 구급상자를 열면 나오는 약들은 어느새 꼭 서랍 한 칸만큼 늘어났다. 그 어마어마한 약들은 당최 알 수 없는 곳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를 정도로 많았다.
배가 아프면 먹는 약, 머리가 아프면 먹는 약, 기침이 나면 먹는 약. 항상 엄마는 약을 건네며 덧붙였다. 엄마가 배가 아플 때, 머리가 아플 때, 기침이 날 때 먹던 약이야. 그 말만 없었더라면, 더 믿음이 가진 않았을까. 그 수많은 약을 기억한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엄마가 건넨 약을 먹으면 거짓말같이 나았다.
어쩜, 다 먹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양이었다. 먹다가 남긴 음식은 버리면서도, 엄마는 약을 버리지 못했다. 내 기억의 가장 처음부터 따지자면 지금보다 훨씬 빠르게 나를 안고 병원에 갔던 것 같다. 어린아이에게 함부로 약을 먹일 만큼 엄마가 무지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나는 다섯 살까지 엄마가 의사인 줄로만 알았다. 그만큼 내게 '엄마의 약손'은 대단한 것이었다.
아주 가끔, 나는 새벽에 아팠다. 내가 기어 다닐 무렵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팔에 깁스를 하고서도 쿵쾅쿵쾅 열심히 기어 다녔다고 하니, 생각 외로 상당히 건강한 몸이었어도 아주 가끔은 아팠다. 웬만큼 아프지 않고서야 병원에 가지 않았고 약조차도 잘 먹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식한 방법이었어도, 나는 내 몸이 약에 길들여지지 않기를 원했다.
응급실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시골이었다. 뭘 잘못 먹었는지 탈이 난 나는 결국 엄마를 깨웠지만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이리저리 약서랍을 뒤지다가 내가 어떻게 아픈지 모르는 엄마는 구역질을 하는 등을 두드리고 열이 끓는 머리에 찬 수건을 갈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가 담담히 믿고 있던 건 반드시 나으리라는 것이었다.
'약의 오남용' 같은 진지한 단어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엄마가 의사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병원에 데리고 갈 만큼 아프면, 아 저 사람은 엄마보다 훨씬 대단한 의사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뿐.
엄만, 도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결핵을 앓았던, 천식을 앓는, 폐가 한쪽, 그것도 반 밖에 남지 않은 엄마가 복용한 약은 한 트럭이 넘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제는 어떤 약도 거의 듣지 않는다는 것도. 가끔 목에 대고 뿌리는 천식약으로 기관지를 넓히는 행위가 얼마나 큰 부작용을 일으키는지, 나는 최근에서야 검색을 해보았다.
가끔 나와 동생을 보며 걱정을 했던 것, 유전될 리 없는 자신의 병마가 아들들에게까지 미쳤을까 봐 당시의 선생님들에게 전화까지 하여 오래 달리기를 시키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사실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군대에 들어가서 내가 3km를 꾸준히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으니.
그리고 서랍을 넘어 찬장까지 늘어가는 약들 사이로 이젠 혈압약이 보이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늙어가는 몸에 투여하는 수많은 약들을 바라보며, 죽으면 항생제 때문에 썩지도 않을 거라고. 이모는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그만큼 쉽게 만났던 수많은 약들 때문에, 나는 아플 때에도 한사코 약을 먹지 않은 것만 같다. 나도 썩지 않는 몸이 되진 않을까.
돌팔이 의사라고 엄마를 놀리긴 해도, 나는 아플 때 엄마에게 약을 묻는다. 이젠 눈까지 잘 보이지 않아 가늘게 실눈을 뜨고 약을 살피곤 '자 이거.'하며 건네면 정말이지 못 미더워도.
그렇게 엄마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아들에게 약을 건넨 뒤 다시 천식약을 목에 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