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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Feb 25. 2016

어린 왕자의 행방

우리의 왕자는 너무 많이 자라 버렸다.


어쩌면 막연하게, 괜찮은 어른이 될 것이란 상상을 했었나 보다.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레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아직 어른이 된 적은 없으나, 어렴풋이 알 수는 있었다. 괜찮은 어른은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도. 화를 참을 수 있어야 하고, 좀 더 유연해야 하며, 아는 것들을 아는 체 하지 않는 일은 어려웠다. 물론 덜 자란 나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이 모든 일이 어른의 덕목이라는 건 편견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은 어른이 어른 대접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일도, 사실 모든 어른이 어른 대접을 받으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과연 그럴까. 정말 말과 같이 그럴까. 나는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판단되는 곳에서 무례해질 수 있을까. 답이 없는 질문을 혼자 안고 앓는 건 피곤했다.


영화 '어린 왕자' 중


어린이 추천 도서에 어린 왕자가 있는 것이 가지는 의미는 그랬다. ‘시험에 나와.’ 그 두 마디 말로 순식간에 동심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언어로 설명될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 요즘의 어린 왕자는 손쉽게 어른 왕자로 설득되어 나왔다. 취직을 못할 것이 분명한 어린 왕자는 이 세계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해볼 생각 있어?

언제나 무섭다, 해볼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은. 볼링공이 땅에 탁 떨어진 것처럼. 나는 왕자가 아니었으니까. 사막에서 길을 잃은 조종사에게 무턱대고 종이에 양을 그려달라고 말을 꺼낼 수 없는 어린이였다. 게다가 양이 늙었다느니, 병들었다느니. 심지어 양이 아니라는 모욕을 줄 생각까지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려준 대로 ‘이게 양인가 보다’ 나를 다독일 참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어른 왕자로 내달리고 있는 내게, 엄마는 어릴 때 재밌게 읽었다며 ‘창가의 토토’ 같은 책을 추천하다니. 생각 없이 받아 든 책을 정신없이 읽는 동안 그렇게 나는 ‘사춘기가 온 까칠한 소년’ 쯤에서 급정거를 당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 해볼 생각이 있냐는 질문은 오롯하게 해볼 생각이 들면 하게 되었다.


갈대 같은 마음을 붙잡는 편이 좋았겠다. 바오밥 나무가 자란다 한들, 게으르고 산만한 나는 소행성 B612를 진작 폭발시켜버렸을지도 모르니까. 진작 별을 세는 사람이 사는 별로 가, 보조 비서가 되어 일하고 있을는지. 난 장미만큼도 지킬 것이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사뭇 든다.


네팔, 룸비니(2016)


부족해? 만족해?


그러나 어딘가 잠시 떠난 것처럼. 어린 왕자는 내게서 떠났다. 아마 쓰기 나름이라고 말했던  듯하다. ’ 시간을 쉴 새 없이, 돈을 쉴 새 없이 낭비하다가 인생마저 낭비하는군.’ 아무리 외쳤다 해도 돌이킬 수 없이 추락하는 느낌은 이럴까. 땅이 저 멀리 보일 땐 ‘낙하산이라도 펼치면 될 일이지.’ 생각하다 어느 순간 땅이 너무 가까워졌다 싶어 미치도록 불안해지는.


그렇게 떠난 어린 왕자는 어느 나라로  출국했을지, 단서조차 남기지 않았다. 왕자를 뒤따라 출국은 했건만, 흔적은 보이지도 않았다. 가끔 양을 그려달라는 아이들은 양이 못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는 티를 결코 내지 않는다. 양이 어떻게 생겼든 초콜릿을 물고 올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되려 내가 양을 그려달라 하면 난색을 표하기까지 하고 만다.


그렇다고 쥐뿔조차 가지지도 못한 채로 난 고개를 치켜들며 다시 양을 그려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감히 내가 그린 양에 불만을  품다니’라고 생각하는 조종사가 있다면, 난 다시 사막에서 내 마음대로 양을 그려줄 조종사를 찾는 게 나을지 모른다. 그러다 오아시스를 찾지 못해 쓰러지는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내 마음에 드는 양을 찾겠다.


네팔, 포카라(2016)


우리의 왕자는 너무나 많이 자라 버렸다. 그리하여 차라리 다리를 분지르더라도 성장판을 콱 닫아버리는 편을 추천할 만큼. 민낯을 너무 많이 봐 버린 탓에 정 떨어진 왕자가 그리 멋지지 않다면 솔직히 말해도 좋지 않나. 아 씨 생각보단 별로네.


비록 B612로 돌아갈 수 없어도. 나는 지금 꼭, 소행성 B617부근쯤 온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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