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권에 스탬프 찍으러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나한테 고백을 했어.
절대 일어나선 안될,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난 너무 싫었나 보다. 듣지 않는 척, 귀 쫑긋 세우고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들어보기로 한다. 영화를 보며 울었다거나, 조금 낯간지러운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이. 그 감수성 넘치는 행동들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다고 여자는 말했다.
여행 노선도 바꿀 수 있다고 그랬다니까.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울 땐 얼마나 깼는데. 낌새가 이상했는데 아뿔싸, 정말 그럴 줄은 몰랐지. 맞장구를 치는 다른 여자. 아니 세계 여행자가? 그렇게 솔직하고 예민해서 어떻게 해. 원래 그런 것들에 엄청 무뎌야 하는 거 아니야?
마치 엄청난 자제력으로 스스로를 컨트롤해야 하고, 함부로 사랑에 빠지면 안 되고, 모든 여행의 카테고리에 거리낌 없는 정보력과 냉철함으로 베테랑의 기운을 내뿜는. 그녀들의 머릿속, 세계 여행자의 이미지는 그랬다.
엄마 나 지금 가야 해.
시간을 잘못 알았다. 분명히 오후 여섯 시인 줄 알았던 비행기는 오전 여섯 시. 아홉 시간쯤 남았나. 짐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던 아들이 침상까지 침범하여 흔들어 깨우자 잠결에, 혹은 얼떨결에 엄마는 성질을 낸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일부러 그랬다면 너무나 미안한 이별이었다. 앞으로 적게는 일 년, 세계를 누빌 아들은 잠든 아버지가 깰까 조용히 기차역으로 향했다. 시골 역의 마지막 무궁화호를 타고 서울로. 그런 모자람이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큰 소리가 우습게도, 어리숙한 모습으로. 걱정 가득 안기고 나는 출발했다. 그리고 하염없이 긴장했다.
언제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나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적어도 나는, 두 번째인 세계 여행자를 만난 적이 없다. 여행책자에 흔히 인용되는 '인생에 한 번쯤.' 그래서 나의 여행길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모두의 한 번'을 지나 내가 두 번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아마 결혼을 한 번 정도 했던 건 아닐까. 그런 의혹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만큼 사려 깊던 그는 참 매력적인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기념품을 싸게 샀다고 좋아했으나, 골목을 돌자마자 같은 물건을 더 싸게 파는 걸 보고 시무룩하던. 그러나 지나온 골목을 돌아가 따지지 못하는 그녀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저녁 식사의 금액이 홀수로 떨어져 더치 페이로 나누기 애매해지자, 꼭 그만큼의 사탕을 손에 쥐어주었던 그녀는 계산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예상외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진 그녀에게 자신답지 않다는 말을 굳이 덧붙여 이 세상 최악의 고백을 건네버린, 그 말에 굳어버린 그녀에게 다시 고백을 철회한 그는. 그 순간 찌질함이 가득한 남자였다.
그가 사투리 억양이 섞인 영어를 사용하면서도 당당했던 건, 혀를 과하게 굴리는 것만이 대화를 잘하는 것이라 여기지 않는 떳떳함 때문이었다. 언젠가 몸이 좋지 않아 일정을 미뤄야 했으나, 일행에게 폐를 끼친다 생각하여 발갛게 열이 오른 얼굴로. 출발하자 부린 고집은 그녀의 치열함이었다.
별반 아무것도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다. 가끔 우리는 허울을 따지기보다 가슴이 따르는 대로 행동하고, 실수도 많이 하고. 사기도 당하며, 서로 그런 일들을 별 생각 없이 말하는. 때로 찌질하고 한심한. 시시한 종류의 인간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곤 했다.
사과를 삶으면 달콤함이 더 강해지는 것처럼 당연히, 그래서 애플파이를 만들기에 적당한 물러짐을 갖는 것처럼. 여행자들은 적당히 눈치를 보고, 적당히 기회를 잡았다. 물론 실패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나의 가격을 두고 모두가 천차만별이었다거나, 그다음 사람에게는 최선의 금액을 알려주는 것도 어떤 의미에선 참 도덕적인 오지랖이었다.
편리함 = 게으름
이 공식은 내 여행의 가장 깊은 깨달음이었다. 대부분의 세계 여행자들은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했으며, 비행기의 프로모션을 찾기 위해 밥 먹듯이 비행사 홈페이지를 들어가는 일이나 적당하지 않은 바가지 금액을 손사래 치고 세 시간이 넘도록 히치하이킹을 시도해 볼만큼 미련하기도 했다. 이는 부지런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아는 형이 우간다에 있다고 연락을 해 왔을 때, 한동안. 막연히 어디에 있는지 알듯이 굴다가 검색을 해보곤 서아프리카가 아니라 동아프리카 더라도 그것에 전혀 개의치 않거나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당당한 것. 어느 도시의 여자들이 예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2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것, 비행기표를 너무나 허망하게 찢는 그 치기를 나는 사랑했다.
누구에게 중요한 일이더라도 내게는 많이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그 미련 없음들. 남다르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은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이 번 돈들을 패밀리 레스토랑이 아니라, 비행기 티켓과 함께 외국의 낯선 어딘가에서 보낼 시간과 교환했다는 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좀 더 끈적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인 대다수의 세계 여행자들은 날짜와 시간을 잊은지 이미 오래이며, 한참 뒤 가끔. 시간이 어디까지 도망갔는지 불현듯 살펴보고서 읽고 있던 책을 다시 펼쳐 아무렇지 않게 읽는 사람들이라고.
그러니 부디, 부탁하건대 세계 여행자를 최전방의 전사쯤으로 여기지 말아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