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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Nov 29. 2016

나이의 맛

생각보다 달큼하지 아니한가.



젊네.


이런 마음에 흠칫 놀란다. 길가에 대학생들이야 치이듯 흔하게 있는 것이었어도, 어깨 맡에 선명하게 있는 숫자가 사람을 움츠리게 한다. 아 춥구나. 이제 아무리 젊은 저 친구들도 꼬박 나이를 먹는 시간이 왔다고. 한 잔 술에 올해를 말아 넣고서 쭉 들이켜는 약속을 잡아야겠지.



나이가 든다는 건.

더 이상 어른이 되려고 다급하게 떡국을 들이켜지 않는 것이 아닐까. 키가 작아 찬장에 손이 닿지 않고, 애써 까치발을 들어야 하는 것들이 얼마나 손해로 느껴졌으면 그랬었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나이. 그리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의 나이.


말문이 막 트이기 시작했을 무렵의 난 엄마에게 그런 자랑을 했을 거야. 엄마, 나 공차기 잘해. 그 나이 때의 애들이야 모두 그렇다고 일반화를 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나 역시 문제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위로하며.


그러나 그건 언제부터였을까. 겁이 난 건지 굴러 오는 공을 차 달라는 말에 누구에게 놀림을 받을까 겁나서 발 안쪽으로 차는 것. 사실 잘 차지도 못하는 공을 보곤 앞꿈치와 발등으로 있는 힘껏 차곤 했었는데. 가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버렸을 때의 민망함도 잊고.




딸꾹질이 멈추지 않는 날엔 괜스레 마음이 상해 물을 마시고, 숨을 참아보고. 남들과 다른 것, 조금이라도 이상해 보이는 것이 싫었다. 삶이 흥미진진할 것이라는 기대 없이 발 빠르게 모든 상황을 잘 파악하고 앞질러야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도 충분하니까.


다정함을 찾으려면 밥은 먹었냐는 엄마의 사소한 말에서도 찾을 수 있었겠지만, 그건 나의 몫이 아닌 양 군다. 아마 애정결핍이었을 거야. 지금도 별 다르지 않지만, 나는 다정함이 필요한 인간이야. 나이를 지긋이 먹지 못했으니까. 그래, 하얗게 자라난 턱수염이 멋있게, 눈가의 주름이 우아하게, 그리고 기필코 멋지게 늙어 보이겠다는 다짐을 반복하며.




시큼털털해.


상하기 직전의 귤, 이미 겉껍질이 까맣게 변해버린 바나나. 딱 그쯤의 아슬아슬한 맛. 아직 달콤할까 싶은 그 기대를 나의 이십 대는 충족하고 있는가 자문해보기도 하고. 아니, 커피처럼 쌉싸름한가. 이게 행복인지 가늠도 못 하는 어리바리한 사내는 이렇게 어설픈 글이나 끄적거리고 만다. 왜 고작 이 정도의 감성밖에 지니지 못했는지 친구에게 투정도 부려봤다. 아, 짜증 나네 정말.


아직도 대학생인 줄 아냐. 마냥 친구들이 대학생일 줄만 알았는데. 자퇴한 나의 시간만 여전히 멈춰있는 줄 알았는데. 금세 너와 나의 학번이 화석이라고 흔히 불리는 성질의 숫자가 되어버렸다니 감회가 새롭다. 진작에 나와 있어야 하지 않았겠냐만, 사회라는 곳이 여간 비겁하고 치졸해야지.


서럽다. 이제 내시경을 하면 용종 한두 개쯤은 흔히 보이려나. 그래도 술 약속은 뜸해졌고, 한 때 잘하면 멋지다고 생각한 욕설도 줄었으며 셀프 스트레스를 양산하는 일도 꽤 멎었으니. 거울을 보며 뒤통수를 쓰다듬고 잘 했다며 웃을 일이다.


그러나 여기저기 시끄러운 분위기 속, 술 약속 하나쯤 챙기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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