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밤 우리는.
다치지 맙시다. 천천히 갑시다. 진심으로 외쳤다.
이미 겨울 문턱이었다. 바람은 가을이라고 말하기 머쓱할 정도로 찼고, 커피를 마신 것도 아닌데 입김이 났다. 곧 손마디가 차질지 모르지만 촛불을 옮기는 손이 여전히 바쁘다. 가족이 모여 나온 쪽도 있었고,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무리를 이룬 곳도 있었다. 그래서 더 잘 들렸으면 좋겠다. 다치지 맙시다. 천천히 갑시다. 우리.
이미 기울어진 저울 중간에 서 있는 건 중립이 아니야.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통에 잊고 있던 또 다른 모임이 생각났다. 너는 언제 오니. 나는 아마 못 갈거야. 광화문에 가야 하거든. 왜 하필 날짜를 오늘로 잡은건지,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이 났다. 정말 생각 없는 녀석이라고 핀잔을 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다. 내가 관여할 수 없는 개인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니까.
친구들은 마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럼 오늘 다들 시위가니까, 홍대에 사람이 없겠네. 한산하게 놀 수 있겠다.
그러나 결코 비난할 수 없다. 자유의지를 존중하니까. 세상이 바뀌길 원하는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지, 다만 움직이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이 변하길 원하는 소리를 듣다 보면 머리가 아플 뿐이다. 불만이 있고, 바뀌길 원하면 응당 그에 걸맞는 사소한 행동 하나라도 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것이 어려운 일이라면 할 수 있는 쉬운 일도 있을 것이라 여긴다.
다시 토론으로 돌아온다.
...근데 어른들은 도대체 왜 그럽니까.
나와 반대되는 정치성향을 띄고 있는데 대부분 늙은 노인들, 할 일 없어서 나온 것 같거든. 정말 그래, 집에서 할 일이 없으니까 나라라도 지켜야 겠다고 나오는거야. 그게 도움 하나 되지 않는 행동이라는 걸 인식하지도 못하고. 할 일 없다고 말할 수도 있어. 젊은이들은 정말 바쁘거든. 양심이 있으면 나오지 말아야지.
나는 젊은이들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 젊은 사람들이 어쩌면 의식이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무기력한 패배주의를 심은 건 어른들이거든. 조종하기 쉽게. 시키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잖아. 정말로. 이렇게 세대갈등을 유발하는 것도, 전부 계획된 것은 아닐까. 결국 아무것도 못 하는 줄로만 아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을거란거지.
그래, 잘못한 건 저 윗 집. 파란 기와집의 큰 어른 뿐이야. 도대체 뭐 하고 계신다니? 진짜 어른들이란 말이야. 이 추위에 여기서 함께 떨고 있는 분들이란 말이지. 두 살 배기 쯤 된 아이 손을 잡고 나와 길바닥에 앉히고 싶은 부모가 어디있겠니.
뭐 맞다. 우린 그래서 이 밤 광화문에 나앉아있지 않은가.
다치지 맙시다.
내려와요, 내려오라구요. 차 위에 올라간 사람에게 하는 말이구나. 그래요 얼른 내려와. 경찰도 국민인걸. 우리끼리는 서로 싸우지 말자구요. 우린 여기 정의라는 값비싼 단어를 이야기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로 세우겠다는 야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기울어진 것, 부조리한 것과 불합리한 것에 대한 말을 하러 왔을 뿐이라고. 그게 잘못된 것이라는 말을 하러 온 것이라고. 아니, 그런데 왜 우릴 막는거에요.
그래서 광장에 앉았다. 레 미제라블의 주제곡을 누군가 부를 땐 얼마나 가슴이 벅차던지 왈칵 울 뻔 하기도 했다. 비가 온다고 했던가. 위험할 거라 했던가. 빌딩 사이로 불던 바람은 해가 가장 뜨겁던, 그러나 가장 차가웠던 오후 두 시께의 그것보다 따뜻했다. 바람은 따뜻했다. 대통령에게 내려오라 외치는 짧은 두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이 메아리 쳐 울릴 땐 오금이 저렸다.
우습게도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것, 안다. 이 말도 듣지 않으리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길거리에 온통 붙은 당신의 하야까지 눈에서 치워버릴 수는 없을거라고. 잔뜩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리라고. 나는 굳게 믿으며 다음을 기쁘게 기다릴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