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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 Nov 04. 2016

잠자는 관 속의 시체

숙면 예찬.


나는 독립적인 공간을 바라면서도 함께 사는 것을 즐거워하여 지금의 2층 작은 방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5년 전까지 내가 지내던 옛 작은 방에선 체육을 하던 거대한 덩치의 남동생과 함께 이불을 깔고 지내야 했는데 그마저도 코골이 때문에 숙면은 여의치 않았다. 한 배에서 나온 동생이 맞는지 의심이 가는 건 그 무시무시한 잠버릇이 이유였고 한 밤에 목이 타 물 한 잔을 마시러 나온 밤, 건넛방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엄청난 코골이에 그 의심은 사라졌다.


적응이 되지 않는 코골이에 자연스럽게 귀마개를 착용하는 밤이 익숙해질 무렵, 그마저도 통하지 않고 나날이 더해가는 코골이에 나는 동생을 많이도 걷어찼다. 제발 좀 그만해. 너무 하잖아. 굴러다니는 건 또 어떤가. 곰 같은 덩치로 두꺼운 다리를 내 배에 턱 올려놓을 때면 숨이 멎는다. 작은 방에 큰 침대가 불가능해 들어온 작은 싱글 침대는 나의 몫이 되었다. 동생은 불만이었다. 형만 침대를 쓰는 것이 못마땅한 그 마음을 잠재우는 건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데굴데굴 잠버릇 고약한 동생이 떨어지면 떨어졌을 테지만, 굴러서 침대 위로 올라가지는 못하리라는 것이 엄마의 말이었다.





야, 괜찮아?


수학여행을 가서 친구들이 호들갑을 떨며 깨우는 바람에 놀라 깼다. 다들 뭐가 좋은지 잠도 안 자고 교과서만 한 티브이에서 나오는 흐릿한 영화를 눈 비비며 보기에 난 먼저 잤다. 그런데 진지한 얼굴로 날 깨우며 하는 말은 죽은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콘도일지언정 연탄을 땔 리가 없는데 죽기는 누가 갑자기 죽는다고 생각했을까. 그러나 나는 너무 관에 누운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미동조차 없던 나는 그 이후로 꽤 유명한 시체가 되었다. 그걸 또 뭐가 좋다고 자랑스레 여겼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수면'이란 나 스스로도 얼마나 원하는 것인가. 매일같이 귀마개를 끼고 잠들어야 했던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에 대하여 다행이라 생각했다. 질 좋은 수면을 위해 어딜 가든 잊지 않고 챙겼던 귀마개.





식욕, 성욕, 수면욕.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이렇게 적자면 나는 단연 수면욕이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잠을 못 잤을 때의 그 스트레스는 나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어서 밤을 새우는 건 거의 해보지 못했다. 꼬박 잠에 들어야만 했다. 안 그러면 어떤 생각도 들지 않고 뇌만 멈춘, 컴퓨터가 종료된 뒤 남아 켜져 있는 모니터의 상태에 가깝다고나 할까. 사람들이 가뜩이나 잠을 줄여 일을 하고 인생의 반을 잠으로 보낸다고 하지만, 세상 가장 사랑하는 것 중 하나는 부드러운 이불속에서 알람 없이 늦잠을 자는 일이라 대답할 것이다.


여행을 다니며 흔히 받는 질문 중 이런 것이 있다. 여행 아이템 중 꼭 필요한 것은? 귀마개와 안대.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없다. 사진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 나는 카메라보다도 저 두 가지를 말한다. 배낭여행 특성상 자게 되는 수많은 장소에서 코 골지 않는 이를 안 만난 적이 없기에. 잠을 못 자면 모든 걸 망치고 마는 나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 귀마개를 구할 수 없는 나라에 가게 되거든 절대반지보다 귀한 것이 된다.


볼일이 있어 방문한 타지에서 계획에 없던 찜질방을 가게 되었을 때, 충분한 숙면을 이루지 못할 것이란 예감이 엄습할 때. 가까운 편의점에서 귀마개를 팔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찜질방에서 가장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헤매고, 결국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아저씨가 술에 취해 내 옆에 자리를 깔 때면 쫓겨나는 심정이 되어 억울해지고 마는 것이다.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밤. 인도의 기차 안에서 잠을 깨고 귀마개가 사라진 걸 안 뒤, 나는 그 지저분한 바닥에 손전등을 비추며 한참 귀마개를 찾았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꼬질꼬질해진 귀마개 한쪽을 발견했을 때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라니. 열 시간이 넘는 비행에서 젖먹이 아이가 울고, 귀마개를 위탁수하물 배낭에 넣어버린 걸 알게 될 때의 그 절망이란. 나는 정말 귀마개 1g에 휘둘리는 인간일 뿐이었다.



요즘 코를 곤다. 때로 이를 갈고.

어떤 분노가 있는지 세상 잡아먹을 듯 이를 가는 건 아니지만, 나도 그 낯선 소리에 스스로 깬다. -뿌드득하면 깬다. 한 번 소리를 내고서, 놀란다. 나도 이를 가는구나. 도미토리에서 가까이 자던 친구가 '너 어제 코 골던데?'하는 말에 믿지 않기도 한다. 내가 얼마나 시체라는 말을 많이 들었었는데. 에이, 설마.


그런 내가 잠버릇이 생겼다. 요즘은 새우잠이 좋고, 다리 사이에 베개를 끼우는 것이 그리도 좋다. 아침이면 다시 정자세로 자고 있지만. 꿀같이 깊은 잠을 자고 난 뒤의 상쾌함을 준다면 코 조금 골아도 괜찮다. 그만큼 치열하고 피곤한 날이었다면야, 옆 방에서 우렁차게 들리는 동생의 코골이에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금세 귀마개를 어디다 두었는지 기억해낸다.


오늘 밤 역시 깊은 잠을 잘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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