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적 할머니 댁에서 보낸 시간들은 내 마음 한 구석에 따뜻한 기억으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다. 지치고 힘들 때 쉬고 싶을 때 들여다보는 나만의 소중한 기억들이 누구에게나 있으리라. 그것이 진실인지 왜곡된 기억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때의 감정이 지금도 여전히 내게 고스란히 남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내가 기억하는 대로 망설임 없이 할머니 댁을 떠올리며 그려나갔다. 초록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커다란 감나무가 나를 반기었고 정면엔 멋들어진 전통 한옷 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문 옆에는 쓰레기를 태우는 공간이 있었고 그 옆엔 짚이 쌓여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옆이 화장실이었는데 화장실은 푸세식이어서 매일 화장실 갈 때마다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이때 만해도 홍콩할매가 유행할 때라 홍콩할매가 나타날까 봐 감나무 옆 텃밭에서 쉬를 했었다. 화장실 옆에는 청록색 문의 창고가 있었는데 그곳엔 할아버지 오토바이가 주차되어 있었다. 할아버지를 떠올리면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모습이 그려진다. 그 옆엔 할머니의 작은 절구통이 있었는데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 어항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부레옥잠이 있었다. 가끔 개구리가 출몰하기도 했다. 그 옆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수돗가가 있었다. 집 뒤로는 대나무 숲이 있었고 대나무 숲 뒤로 산 하나가 떡 버티고 있었다. 날이 더울 때 뒤쪽으로 가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숨바꼭질하기에도 제격이었고 뱀 구멍이 있나 찾아보곤 했었다. 수돗가를 정면으로 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할머니와 엄마는 부엌과 수돗가에서 주로 머물며 가족들의 식사를 책임지셨다. 부엌문을 통과하면 왼쪽엔 작은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고 정면에는 안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안방으로 들어서면 할아버지께서 늘 아랫목에 앉아 무언가를 읽거나 쓰고 계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늘 정갈하시고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셨다. 식사도 늘 소식을 하셨고 항상 밥 한 숟가락을 남기셨는데 새댁이었던 엄마는 할아버지가 항상 한 숟가락을 남기시니 밥 양이 많으신가 하고 밥 양을 줄여서 드렸는데도 꼭 한 숟가락씩 남기셨다고 한다. 그만큼 자기 관리를 잘하시는 분이셨던 것 같다. 안방에는 지금으로 말하면 붙박이장이 있었다. 붙박이장에는 이불, 서류 등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는데 어린 나에게는 숨바꼭질 장소 중 하나였다. 할아버지가 앉아계시던 자리 왼쪽은 마당을 나가는 문, 즉 안방의 정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면 마루가 나왔고 마당과 대문 옆에 자리한 감나무와 하늘, 마을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자동차 3대가 들어와도 자리가 넉넉할 정도로 커다란 마당이었다. 그리고 안방에서 연결된 문을 지나면 광이 있었는데 광에는 곡식, 먹거리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광에 들어가실 때마다 맛있는 게 먹고 싶어서 쫄래쫄래 따라 들어가 곶감이나, 쌀과자를 얻어먹곤 했었다. 광에도 마루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있었다. 광 옆에는 작은 집이 또 하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 별채였으리라 짐작한다. 증조할머니가 머물던 곳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옆 쪽으로는 소 외양간이 있었다. 개도 있었다. 그 옆에는 소여물이 쌓여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또 그 옆에는 부엌 아궁이가 딸린 사랑채가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이곳에서 신혼을 시작하셨다. 훗날에는 작은 아빠가 결혼을 하시면서 부모님은 작은방으로 거처를 옮기셨고 사랑채에서는 작은 아빠와 작은 엄마가 신혼 생활을 하셨다. 할머니 댁은 조용할 날 없이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식구도 많았을뿐더러 발이 넓은 할아버지 탓에 동네 사람들의 방문도 잦았다. 그래서 엄마는 손에 물 마를 날이 없으셨다. 나도 한 두어 번 거들었던 기억이 나는 게, 할아버지 친구분이 방문하셔서 술상을 봐오라 하셨고 엄마와 함께 고사리같은 손으로 안주로 먹을 김치와 소주잔을 놓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바다에서 낚시해서 잡아온 운저리 생선 무침이 있었다. 마루에서 담소를 나누는 할아버지 옆에서 나는 처마에 지어진 제비집을 구경하거나 집 이리저리 다니며 놀거리를 찾곤 했었다.
아빠는 9남매라 형제자매 조카가 다 모이면 발 디딜 틈 없이 집이 가득 찼다. 가부장적인 식구 많은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간 엄마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상을 차려내기 바빴다. 셋째 며느리였는데도 불구하고 할머니와 같이 산다는 이유로 늘 부엌대기를 면치 못했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까지 남자들 밥상과 여자들 밥상을 따로 차려서 먹었다. 반찬도 남자들 밥상과 여자들 밥상이 은근히 차이가 있었다. 나는 어린아이였음에도 왜 밥을 따로 먹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 번은 남자 밥상에서 밥을 먹으려고 앉았는데 나는 저쪽 여자 밥상에 가서 먹어야 한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명절에도 아들손주와 딸손주에게 주는 세뱃돈 액수를 달리하셨다. 아들 손주는 천 원, 딸손주는 나이 상관없이 오백 원이었던 기억이 난다. 내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세뱃돈 받을 때마다 남동생을 꾀어 오백 원이 더 좋은 돈이라며 천 원과 맞바꿔치기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은 남아선호사상이 박혀있던 시대였으니까.
할아버지 댁은 사람뿐만 아니라, 제비가 집을 짓고 알을 낳고 새끼가 부화하여 다시 날아갈 때까지 처마 밑에도 세입자들로 가득했었다. 할아버지와 큰 아빠들, 작은 아빠는 농사를 지으셨는데 곡식을 수확하는 철마다 마당에 쌓아두고 온 식구가 매달려 작업을 했다. 그중 쌀을 작업했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이고 지고 나르는 조, 농기구로 벼 껍질을 벗기는 조, 그 아래서 체로 다시 걸려 쌀을 고르는 조, 쌀을 담는 조로 나뉘어 일사불란하게 일을 했었다. 또 마당 한편에는 늘 무언가를 말리고 있었다. 고추, 호박, 고사리 등
장소 하나하나를 그리다 보니 그 장소에 묻어있는 추억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렇게 북적이던 할아버지 댁은 손주들이 장성하면서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드문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 소리로 시끄럽던 마을은 점점 아이들 소리를 듣기가 어려워졌고, 자식들도 타지에 나가 사느라 명절 때 말고는 찾아오는 횟수가 점차 줄어갔다. 우리 가족 역시 타 도시로 이사하면서 더더욱 찾아뵙기가 어려워졌다. 내가 기억하던 할아버지 할머니 댁은 늘 사람들 소리로 시끄러웠지만 따뜻한 정이 넘치는 곳이었다.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많은 것이 변해갔다. 웅장했던 집은 점점 초라해져 갔고, 더 이상 쓰임 받지 못하는 집의 형태로 점점 변해갔다. 어릴 적 내 눈높이서 높게만 느껴졌던 마루는 한 번에 올라가고도 남을 만큼 낮아진 느낌이었고, 널따랬던 주방은 이렇게 작았나 싶을 정도로 작아 보였다. 이 작은 주방에서 10명이 모여 앉아 전 부치고 송편 빚고 했었나 싶었다. 사랑채는 더 이상 사랑채의 쓰임을 다해 폐가로 변해있었다. 음메 하던 소는 이제 더 이상 없고 집을 지키던 개도 떠나고 없었다. 늘 할아버지가 앉아계시던 자리에는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먼지 쌓인 수첩과 모나미펜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냉장고를 채우기가 바빴던 시절은 가고 냉장고에는 더 이상 새로운 음식이 들어올 자리가 없이 오래된 음식들만이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를 업어주던 든든했던 할머니는 고등학생인 나보다 작은 체구의 꼬부랑 할머니가 되셨다.
언젠가 한 번은 할머니 댁에 혼자 갑자기 찾아가 하룻밤을 지냈던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찾아오는 이 없는 집에서 티브이소리를 위안 삼아 꾸벅꾸벅 졸고 계셨다. "할머니 할머니 나 왔어~ " 하고 들어서자 불이 켜진 안방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요~" 하며 문을 열던 할머니는 나를 보자 버선발로 나와 마중해 주셨다. "아이고 내 강아지 왔는가~" 사실 할머니를 보고 싶어서 찾아갔던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 친구를 만나러 갔던 길에 버스가 끊겨 할머니 댁에서 자고 가야겠다 생각하고 찾아갔던 것이었는데 나를 반기는 할머니를 뵙자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할머니는 밤새 나에게 인생의 조언들을 쏟아내셨는데 당시에는 잔소리 자장가로 생각하고 잠이 들었었다. 그런데 살면서 그때 할머니가 해주신 이야기들이 간간히 생각이 난다. 가장 기억에 남는 말씀은 "바르게 살아라. 부모를 공경하라."였다.
할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은 동네 경로당이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어 할머니를 찾아갔을 때였는데 경로당에는 동네 할머니들이 한 자리에 모두 모여 TV를 시청하고 계셨다. 찾아올 이 하나 없는 시골 끝자락에 외로운 마음을 서로의 온기로 달래는 분위기.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모든 할머니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한 할머니가 물었다. "누구요?" "우리 할머니 찾으러 왔어요." "누구 손지(전라도 사투리 손주) 요?" "잠깐만요." 나는 앉아계시는 할머니 한분 한분 얼굴을 보며 우리 할머니를 찾았다. 너무 자란 나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하는 할머니와 눈을 마주치며 "할머니! 나야 화영이!" "어이구 우리 손지구나!"하시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오셨다. 그 모습을 부러워하며 바라보시던 다른 할머니들의 눈빛을 뒤로한 채 나와 할머니는 내가 기억하던 온기를 찾아 할머니댁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제는 혼자가 된 할머니 집에는 내가 기억하던 따뜻한 온기가 없었다. 어딘지 모를 쓸쓸함만이 남아있었다. 더 이상 기능을 잃은 공간들은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차가운 공기와 거미줄만이 나를 반기었다. 늘 풍성한 열매를 맺던 감나무도 뼈만 앙상하여 스산한 느낌까지 주었다. 매년 찾아오던 제비들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지 텅 비어 있었다. 추억이 묻은 장소를 하나하나 돌아보고 만져보며 홀로 남아 자식들을 그리워했을 할머니를 보자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럼에도 그 이후 할머니를 잊고 내 인생 사느라 바빴다. 그 사이 나는 대학교를 졸업했고 졸업하자마자 해외로 떠났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할머니께서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전해오셨다. 그제야 할머니 생각이 났다. 그 길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지만 안타깝게도 할머니 가시는 마지막 길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내가 인천공항에 오전 8시 비행기로 도착했는데 할머니는 3시간 전인 5시경 이미 소천하셨다. 몇 시간만 더 일찍 도착할 걸 하는 후회로 곧장 할머니 장례식이 준비된 병원으로 갔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모든 형제자매 식구들이 한 데 모여있는 모습을 보니 그리움과 아쉬움, 죄송함의 여러 감정들이 복잡하게 올라왔다. 늘 그 집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던 할머니는 이제 우리 곁에 없다. 그 집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보존되었으면 좋았으련만 할머니 댁이 있던 자리는 이제 밭이 되어버렸다. 할머니 댁을 정리하던 날 우리 집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오래된 농기구들, 박물관에서나 볼 듯한 고물이 돼버린 미싱기구, 지게, 채, 소쿠리, 망태기, 멱둥구미, 맷돌 이름 모를 수많은 도구들도 같이 사라졌다. 할머니의 물건 중 우리 가족에게 남아있는 건 이불 한 채이다. 할머니가 직접 한 땀 한 땀 손바느질로 만든 이불 한 채만이 우리의 추억들이 살아있음을 알려준다. 할머니의 삶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할머니가 보여주신 가족들을 위한 헌신과 베풂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
할머니 사랑했어요. 늘 기억할게요. 편히 쉬세요. 그리고 다음 생이 있다면 또 할머니의 손녀로 태어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