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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하나 너머

프롤로그

by 바카

우리 집 현관문을 열면 정면에 보이는 문.
그곳엔 할머니가 홀로 사신다.
이야기는, 그 문을 사이에 두고 살아온 시간의 기록이다.



할머니를 처음 만난 건 3년 전, 내가 이 아파트로 이사 온 날이었다. 당시의 할머니는 정신이 또렷했고, 말투도 부드러웠다. 독일 특유의 딱딱하고 차가운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던 내게 처음으로 따뜻한 정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낯선 타지에서 만난, 다정한 이웃.


할머니는 이 아파트가 지어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곳에서 살아오셨다. 벽지도 낡고 세월이 느껴지는 그 집엔, 오래된 가구와 함께 시간이 고스란히 쌓여 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할머니의 정신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벼운 깜빡임이었지만, 점차 기억은 뒤엉키는 날이 잦아졌다.

어떤 날은 주방 인덕션을 잘못 조작해 불이 날 뻔한 일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달려갔고, 할머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미안해하셨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열쇠를 목에 걸고도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하거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넣지 못해 문을 여는 데 한참이 걸리거나, 집 열쇠와 현관 열쇠를 혼동하여 문 앞에서 한참을 헤매이는 모습을 자주 마주하게 됐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내게 도움을 요청하시곤 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때때로 외출하는 것이 무섭다고 하셨다. 내가 집에 있을 때는 도와드릴 수 있지만, 내가 집을 비우는 날에는 다른 이웃에게 도움을 청하시거나 길가는 행인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하신다. 어떤 날은 밤늦게 외출하셨다가 시간이 너무 늦어 나와 다른 이웃의 벨을 누르지 못해 문 앞에서 행인이 지나갈때까지 한시간이나 기다리신 적도 있었다. 후로 나는 집을 비우기 전에 꼭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다. 하지만 안타까운 건 그조차 잊으시는 날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오븐도, 전자렌지도, 인덕션도 전혀 다루지 못하신다. 시력마저 나빠져 식사를 챙기는 일조차 힘겹다. 다행히 스웨덴에 사는 할머니의 언니와 연락이 닿으면서, 지역 복지기관에 등록되어 매일 가사도우미가 방문하게 되었다. 간단한 청소와 요리, 약 챙김은 이제 그들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낯선 이의 손길을 불편해하셨고, 몇 번이나 서비스를 취소하려 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취소조차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기에, 그 일상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두번 정도 할머니의 생사를 확인할 겸 식사를 챙겨다드린다. 따뜻한 밥 한 끼를 들고 노크할 때마다 할머니는 환하게 웃는다. 그 웃음 속엔 오래도록 누군가를 기다린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 내가 해 드리는 음식은 늘 반가워하시고, 맛있게 먹었다고 꼭 인사를 하신다. 할머니가 건강하셨을때는 내가 뭔가를 해드리면 꼭 그릇에 무언가를 채워서 돌려주시곤 했었는데 아프시고 나서부터는 그릇에 휴지를 담아서 주시거나, 일회용봉지를 둘둘 말아서 주시거나 하신다. 잘보이지 않는 눈과 잘 구부러지지 않는 손으로 깨끗히 설거지를 하신 후 무엇을 줄까 고민했을 할머니를 상상하면 마음이 아련해진다.


다행히 할머니는 아직 나를 기억하신다. 이름은 틀리셔도, "우리 앞집 사랑스러운 이웃"이라고 이웃들에게 소개하신다. 그리고는 같은 이야기,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반복하신다. 수십번 넘게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지겨울 법할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지겹지가 않다. 내 마음안에 나의 친할머니에 대한 사랑이 그리움과 감사함이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 없이 혼자 살아가는 한 인간의 삶이 안타깝고 쓸쓸한 무언가가 나를 붙는 걸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종종 나를 붙잡고 이런저런 말을 이어가며 시간을 붙든다. 그런 할머니를 볼 때면, 마음 한 켠에 조용히 물기가 고인다. 그리고 문득, 언젠가의 내 모습이 겹쳐 보인다.


이 이야기는 그런 할머니에 대한 기록이다. 나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아가는, 안개 속을 걷듯 기억이 흐려지는 나의 이웃 할머니. 그리고 그 곁을 조용히 함께 걸어온 소중한 시간에 대해, 누군가 이 이야기를 읽고, 이 세상 어딘가에서 잊히고 있는 또 다른 ‘할머니’를 떠올려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할머니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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