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시간 속을 오가는 할머니.
어떤 날은 젊은 날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날,
어떤 날은 할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머무는 날,
겹겹이 쌓인 기억의 층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도 곁을 지킨다.
복도에서 마주한 할머니는 눈이 반짝이는 스물네 살의 아가씨가 되어 계셨다.
어깨는 곧게 펴고, 긴장감 있는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병원 예약이 있어요.”
그날 할머니는 예쁜 옷을 골라 입으시고, 아프기 전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할머니 어디 가세요?"
"병원 예약이 있어서 나가는 길이에요."
"네, 같이 가드릴까요?"
"애기 엄마 바쁜데 괜찮겠어요?"
"네, 저 오늘은 시간이 돼요. 같이 가요."
그날의 할머니는 분명, 지금이 아닌
그 젊은 시절 어딘가에 살아계신 듯했다.
그 기억 속 하루를 따라 사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간 여행 같았다.
할머니와 함께 병원에 가니,
병원 관계자들은 나의 존재를 반가워했다.
그동안 할머니가 예약된 요일과 시간을 착각하여 다른 날에 방문하거나,
직원들을 붙잡고 여러차례 같은 질문을 반복했을 일이 눈에 선했다.
할머니 역시 나의 존재가 든든하다는 듯이
그들에게 나를 소개했고,
진료실에도 같이 들어가달라고 부탁하셨다.
마치 보호자처럼.
병원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고맙다며 카페에 가서 차 한잔 하자고 제안하셨다.
카페에 가보신 날이 아마도 아주 오래되셨으리라 생각이 들어,
같이 가려고 했지만,
시간이 되지 않아 바로 집으로 돌아와야했다.
아쉬움이 가득 묻어난 할머니 표정을 보자,
제안을 거절한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또 어떤 날은 전혀 다른 층의 기억에서 살고 계셨다.
“그이가 떠난 지 며칠 됐다고…”
할머니는 눈가에 깊은 주름을 간직한 채,
아무 말 없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는 벌써 8년.
하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그 일이 ‘어제 일’인 것처럼 슬퍼하고 계셨다.
할아버지의 흔적은 아직도 방 안 구석구석에 남아 있었다.
옷장 안의 할아버지가 입던 코트,
선반 위에 놓인 할아버지의 시계와 안경,
그리고 벽에 붙어있는 편지 한 장.
그 편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직 후
할머니가 혼자 쓴 편지였다.
“당신이 없는 내 삶은 무너져버렸어요.
그날 이후로 나는 단 하루도 편히 잠든 적이 없어요.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어요.”
편지를 보니 마음이 아려왔다.
한편으론 나도 할머니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저렇게 한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뒤, 할머니의 옷장을 정리하다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젊은 시절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란히 앉아 함께 웃고 있었다.
그때의 할머니는 정말 멋쟁이 아가씨였다.
세련된 복장의 투피스에 높게 올린 머리,
오래된 영화속에 나오는 여주인공 같은 모습이었다.
그 옆에는 듬직한 청년이 환한 미소로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할머니는
휘어진 허리와 굳은 관절로
이 계절을 겨우 따라가고 계신다.
여름 티셔츠에 겨울 바지를 입고,
겨울 옷에 여름치마를 입고,
어느 계절 속에 살고 계신 건지 늘 헷갈려 하신다.
계절, 날짜, 시간 감각이 떨어진 할머니는
"할머니 지금 봄이에요." 하고 말하면
"하, 벌써 봄이에요?" 하며 놀라시곤 한다.
할머니 안에 층층이 쌓여있던 그 모든 시간들이
이제는 뒤죽박죽 뒤엉켜 순서가 뒤바뀐 기억들이 할머니를 점점 지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