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왜 읽어요(3)

책은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느끼며, 더 잘 판단하게 만든다.

by 라봉파파

사랑하는 아내와 연애를 할 때 꽃을 선물하곤 했다. 지금도 아내에게 결혼기념일마다 꽃을 선물한다. 남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들은 사랑하는 남자가 필요할 만한 것, 어울릴 만한 것, 있으면 좋을 것, 내 돈 주고 사기는 아깝지만 굉장히 쓸모 있는 것 등등 센스 넘치는 선물을 아주 잘한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내가 알고 있는 남자들은 그런 능력이 여자들에 비해 매우 떨어진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기념일이나 생일이 되면 지레 긴장을 하고 필요한 게 있다면 얘기해달라고 넌지시 묻는다. 그러다가 안 되면 엄청 실망스러운 선물을 하거나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과대한 이벤트로 넘어가기 일쑤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어차피 꽃은 선물의 기본이고 남자들은 꽃 선물을 한다.

우리 아내는 꽃 선물을 좋아했다. 꽃 한 송이, 꽃 한 다발 상관없이 꽃을 선물해주면 좋아했다.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꽃을 선물했는데 싫어 마다할 여자가 있다면 싫은 척을 하고 있거나, 낭만을 모르는 사람이라서 그런다. 그런 경우가 아니면 싫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나는 단순히 꽃이 예뻐서 꽃 선물을 좋아해 주는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면 꽃 선물은 단순히 꽃을 선물한 게 아니다. 꽃과 시간과 정성을 선물한 것이다.

꽃과 상관없는 직업을 가진 남자들이 꽃집에 들어갈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나는 꽃과 직업적으로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물론 초등학생들에게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게 하거나 꽃의 생김새를 관찰하고 기능을 살펴보도록 가르치지만 직접 꽃집에 들어갈 이유는 없다. 과학실에 혹은 학교 옆 공원에 꽃은 널려있다. 그래서 남자들이 꽃집에 들어가는 건 되게 어색한 일이다. 쭈뼛쭈뼛 들어가 공손히 인사하고 종류도 잘 모르는 꽃을 들여다본다. 이윽고 사장님이 찾는 게 있냐고 물으면 대뜸 선물을 하려고 한다는 동문서답을 한다. 그러면 사장님은 몇 가지 샘플을 보여주면서 결정을 시키거나, 조금 더 터프한 사장님은 예쁘게 해준다며 알아서 꽃다발을 만들어 주신다. 그렇다. 남자들에게 꽃을 사는 건 낯선 일이다. 꽃을 사서 거리를 걸으면 다른 사람의 눈총을 받게 된다. 이런 일들은 조금 불편하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오늘도 남자들은 꽃집에 들러 꽃을 산다.


유명 인사나 연예인에게 사인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나는 아주 유명한 유튜버에게 찾아가 직접 사인을 받은 적이 있다. 또, 제자 중 한 녀석이 역사저널 그 날에 출연하고 있는 최태성 선생님을 만나러 간다고 해서 사인을 부탁한 적도 있다. 유튜버의 사인에는 ‘명훈님! 즐거운 수영하세요!’라고 써져 있었고, 큰별쌤의 사인에는 ‘교육 동지 한명훈 선생님! 한 번 뿐인 젊음을 어떻게 사실건가요?’라고 적혀 있었다. 기분이 참 좋았다. 나는 그들에게 단순히 사인 한 장을 선물 받은 게 아니었다. 나는 그들에게 시간을 선물 받았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만 그 사람은 나를 몰랐다. 그러던 그가 나를 위해 1분 남짓의 시간을 써준 것이다. 그 사람의 수많은 인생 중에서 나를 생각해 준 시간이 생긴 것이다. 사인이라는 선물은 종이 한 장으로 존재 하는 게 아니라 귀중한 시간의 징표로 존재한다.

maxresdefault.jpg <러블리 스위머 수영교실 - youtube>

꽃 선물과 사인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맥락(脈絡)이다. 인간은 맥락context 속에서 살아간다. 그 어떤 인간도 맥락을 무시하고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행위 동기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 남자가 어색함을 이기고 꽃 선물을 하는 행위 동기는 사랑하는 사람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유명 인사나 연예인에게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서는 행위 동기는 시간을 선물 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 사람이 나를 약간의 시간이나마 생각해줬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그런 것이다. 꽃 선물과 사인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꽃 선물과 사인의 맥락을 이해한 것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난 배경이나 이유, 어떻게 진행되는지의 흐름을 우리는 맥락이라고 한다. 맥락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우리는 어떤 존재, 어떤 행위, 어떤 사람, 어떤 사건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가장 기피하는 학년이 있다. 바로 1학년과 6학년이다. 1학년은 EBS 극한직업에도 소개가 됐다. 궁금한 독자는 포털사이트나 유튜브에 ‘극한직업 초등학교 1학년’이라고 검색을 하면 콘텐츠를 살펴볼 수 있다. 말 그대로 Extreme Job이다! 극한직업에는 소개가 되지 않았지만 6학년은 다른 차원의 극한직업이다. 6학년을 맡는 선생님들은 대체로 신규 교사이거나 젊은 남자 교사인 경우가 많다. 나도 첫 발령 후 4년간 6학년을 맡았다. 너무 힘들어서 저녁에 고기를 많이 먹었더니 살이 쪘다. 힘들면 살이 빠진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맥락을 이유로 들 때,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을 지도하는 게 어려운 이유는 그들이 맥락이 거의 없는 학생들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들은 초등학교에 처음 들어온 아이들이다. 초등학교에는 수많은 규칙과 규율, 질서가 존재한다. 이제 갓 입학한 그들에게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을 바라는 건 큰 욕심이다. 초등학교에 들어와 처음 맞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동안 학생들은 적응을 해간다. 그동안 초등학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니 적응의 기간도 길 터다. 1학년을 맡은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초등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을 이해시키고 적응시켜야한다.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을 지도하는 게 어려운 이유는 1학년 지도와 완전히 다르다.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은 맥락이 너무 많고 중구난방이다. 하나의 통일된 맥락을 찾기 어렵고, 개개인의 맥락은 큰 차이가 생겼다. 그리고 너무 오랜 시간 맥락이 쌓여왔다. 학생 개개인의 성격과 사고방식, 행동요령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학생을 하나의 방법으로 지도할 수 없게 됐다. 또한 어떤 학생의 생각을 바꾸기가 다른 학년에 비해 훨씬 어려워졌다. 이미 고착된 생각에는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 자존심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종이 한 장을 접는 건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종이들이 모인 책 한 권을 접는 것은 불가능하다.

초등학교 6학년을 여러 번 맡으면서 괜히 6학년 아이들이 힘들었다고만 적은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다. 나는 6학년을 여러 차례 희망해서 배정받았고 지금도 6학년 학생들과의 좋은 추억을 많이 간직하고 있으니 독자 여러분께서는 오해가 없으시길 바란다.


어쨌든 맥락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책은 아주 강력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책은 하나의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내가 읽는 책은 보통 300쪽 내외의 분량을 가지고 있다. 글자 크기를 10pt로 잡았을 때 A4 용지를 기준으로 대략 100매에서 150매 사이가 대략 책 한 권의 분량이다. 책은 하나의 큰 주제를 가지고 아주 오랫동안 이야기한다. 우리는 책을 통해 그 주제에 대한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매체보다도 더 심도 있게 배울 수 있다. 책은 하나의 주제를 정직하고 깊이 있게 관통하는 매체이다.

교육계에서는 ‘온 작품 읽기’라는 교육 패러다임이 유행하고 있다. 패션에도 유행이 있듯, 교육에도 유행이 있는 법이다. 나는 이 유행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온 작품 읽기가 가진 문제의식은 매우 중요하다.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다양한 지문들은 하나의 작품을 온전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문학 작품을 이해했다고 말하면 곤란하다. 문학 작품을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짧은 지문을 읽었고, 설사 그 지문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해도 문학 작품을 읽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앞, 뒤가 잘려있기 때문에 문학 작품이 가지고 있는 맥락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문이 끝난 다음에 나오는 ‘글의 내용을 파악해 봅시다.’는 가능하다. 그렇지만 ‘글을 읽고 내 생각을 말해 봅시다.’는 엄밀한 의미에서 내 생각을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오로지 교과서에서 모범 답안이라고 인정하는 생각을 말해 보라고 강요하는 것 밖에 안 된다. 학생들에게 맥락을 파악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은 하나의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면서 맥락을 소유하게 된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맥락을 파악하게 된다. 맥락은 위에서 얘기했듯, 어떤 존재와 어떤 행위, 어떤 사람과 어떤 사건을 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즉, 세상에 대한 지평을 넓히고 사물의 이치를 판단하는 통찰력을 단련시키며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우리 학생들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책을 끼고 살기를 바란다. 책을 읽지만 수학 공부를 못하는 수포자(수학 포기자)는 존재한다. 하지만 책을 읽지 않는 지식인은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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