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2)

좋은 글은 내가 판단한다

by 라봉파파

오해하면 곤란하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좋은 글도, 절대적으로 나쁜 글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언제나 독자에게 주어져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예찬하는 글이 나에겐 별 영감을 주지 못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글이 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 즉,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판단하는 건 내가 하는 일이며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그저 참고만 하면 된다.

V1600651p_01.gif 부산행, 2016년 7월 개봉, 연상호 作

이것은 마치 문학 작품이나 영화를 보고 나서 각자의 반응이 다를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1,000만 관객이 넘은 영화를 흥행에 매우 성공한 영화라고 평가한다. 나 역시 1,000만 관객이 넘은 영화는 입소문에 꼭 보고는 한다. 하지만 그런 영화가 늘 재밌거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런 영화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이다. 부산행은 기차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좀비와 사투를 벌이며 딸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연출한 스릴러 영화다. 좀비는 사람들에게 호기심, 공포, 두려움을 주는 존재다. 과거 흥행 보증 수표였던 처녀귀신이나 빨간 마스크처럼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꽤 훌륭한 소재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영화의 예고편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끌었다. 하지만 영화가 상영된 다음, 이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었다. 한국형 좀비물의 신호탄을 쏜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이다, 러닝 타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손에 땀을 쥐고 본 작품이다 등의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다. 반면 어설픈 좀비들이 겁을 주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애처롭다, 왜 이 영화가 이렇게 입소문을 타는지 알 수 없다는 등의 부정적인 평가도 많았다. 어쨌든 이 영화는 1,000만 관객을 훌쩍 넘었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결국 관객들 각자의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부산행이 좋은 영화인지, 1,000만을 넘길 정도로 흥행에 성공할 만한 영화인지는 어느 누가 쉽게 결론내릴 수 없다.


글도 마찬가지다. 글은 사람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이끌어 내는 도구이다. 물론 글을 쓴 사람은 어떤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이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독자에게 그러한 목적과 의도가 충실하게 전달됐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어쩌면 모든 독자가 똑같은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 건 글이 주는 아름다움, 가치, 감수성을 헤치는 일인지도 모른다. 글은 모든 사람에게 다양하게 해석되어, 다양한 반응을 낳고, 다양한 생각들이 서로 밀고 당기며 어우러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평가할 때는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는지 보다도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즉, 좋은 글은 내가 판단하고 내가 평가한다. 그게 맞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등학생 시절,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나온 사람이 있었다. 2018년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맡고 있는 ‘도종환’ 시인이었다. 우리에게 도종환 시인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매일매일 풀고 있는 언어영역 문제집에서는 항상 글쓴이의 의도를 묻는 문제가 많이 출제됐었다. 그 글쓴이를 직접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직접 글쓴이의 의도를 물어볼 수 있는 시간이 생기다니! 어떤 학생이 질문했다.

“도종환 선생님. 선생님께서 쓰신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를 비롯해 여러 시들을 문제집에서 많이 보고 있습니다. 선생님 시가 문제로 출제되고 있는 것을 아시나요?”

“잘 알고 있죠. 저는 제가 쓴 시로 만든 문제를 잘 트립니다. 허허허.”

도종환 시인은 자신의 시가 하나의 답으로 귀결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자신이 쓴 시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쓴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해석되길 바라고 쓴 것도 아니란다. 오직 독자가 자신의 글을 읽고 독자의 상황에 맞게 잘 이해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여기, 내가 좋아하는 도종환 시인의 시 한 편을 잠깐 적어보고 싶다.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 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 쯤은 꼭 다시 걸어 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 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이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턱 자르더니

저녁엔 해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참으로 멋진 시다. 이 시를 읽으면 그동안 후회를 남긴 일을 용서하게 만들고, 그동안 잘못을 했던 일을 참회하게 만든다. 이 시는 도종환 시인이 걸어온 ‘그 길’이 무엇인지 살펴보라고 단 한 번도 얘기하지 않는다. 이 시는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당신의 길’을 살펴보게 만든다. 이 시가 좋은 글인지는 독자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맞다. 나는 이 시가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 같아서 좋다. 당신은 이 시가 마음에 드는가? 마음에 든다면 왜 마음에 드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왜 마음에 들지 않는가?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면서 이 글이 자신에게 좋은 글인지 아닌지 판단해보길 권한다.


좋은 글은 각자의 판단에 맡겨지는 것이다. 독자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좋은 글은 훨씬 많을 것이다. 나는 대학생 때까지 현대시에 까막눈이었다. 일단 현대시는 읽기에 매우 불편하다. 그 때는 국한문 혼용체를 많이 썼기 때문에 시를 보면 한글 반, 한자 반이다. 예를 들어 ‘작난’이라는 글자를 읽은 적이 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무얼 뜻하는지 몰랐다. 공부를 더 해보니 작은 무언가를 만든다는 뜻의 작(作)이었고, 난은 어렵게 한다는 뜻의 난(難)이었다. 무언가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은 요즘 말로 ‘장난’이다. 그렇다. ‘작난’은 ‘장난’이었다. 현대시는 참 읽기 불편하다. 또 현대시는 시대상황을 반영한다. 특히 우리나라의 현대시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창작된 것들이 많다. 그래서 시의 속뜻을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대상황과 맥락, 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아직 공부가 부족했던 나는 현대시를 잘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공부를 계속 해보니 이해할 수 있는 몇 개의 글이 생겼다. 특히 이용악 시인(1914-1971)의 ‘낡은 집’은 너무 슬프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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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집>


이용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거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 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 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선 식민지 상황에서 고난과 역경을 겪어야했던 수많은 조선인들의 삶을 공부해야 한다. 이 시는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들이 유랑의 생활을 해야만 했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1연에서 은동곳과 산호관자가 없다는 말은 값비싼 보물도 없고 관직도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즉 이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어렵게 살아가는 백성들이다. 그 백성 중에서 ‘털보’라는 인물의 가족 이야기는 가난한 백성들의 삶을 대표한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탈한 후에 두 가지 사업을 벌였다. 회사령과 토지조사사업. 둘 모두 조선에서 발생하는 모든 생산물과 생산수단을 수탈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조선인들은 그렇게 가난과 역경 속에 파묻힌다. 털보네도 그러했다. 털보의 셋째아들은 축복받지 못한 출생을 했다. 너무 가난해서, 팔아먹을 소도 없어서 기쁨을 주기보단 걱정과 시름, 눈물을 선사했다. 털보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렇게 털보네 일곱 식솔은 추운 겨울날, 더 추운 북쪽 어딘가로 떠났다. 대학생 때까지 나에게 이 시는 이해하기 힘든 글이었다.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좋은 글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이 시가 주는 슬픔을. 이 시가 주는 시대의 아픔을. 그래서 지금, 이 시는 나에게 좋은 글이다.

누가 어떤 글이 좋다고 읽어보라고 추천해도 시무룩했던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그렇다. 글은 나 자신과 상호작용한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해도 나에겐 미지근할 수 있다. 좋은 글은 내 느낌이고 내 판단이며 내가 평가하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들이 수준이 높아져 세상의 수많은 글들이 뽐내는 아름다움을 만끽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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