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읽는 것보단 천천히 읽는 게 좋다
얼마 전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영역 시험 문제를 함께 풀어봤다. 물론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에게 실제 수능과 동일한 시간을 주고 모든 문제를 풀라고 하면 너무 가혹한 처사이다. 학생들이 어느 정도 맞출 수 있을 것 같은 몇 개의 문항을 선별해서 시험지를 나누어줬다. 역시 곳곳에서 볼멘소리가 터졌다. ‘선생님, 이걸 어떻게 풀어요?’, ‘저 대학교 안 갈 거예요.’등등 아이들의 절망을 추스르는 데에는 언제나 그렇듯 많은 설득이 필요하다(시험지를 받자마자 구겨버리는 학생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어쨌든 나는 굳은 결의로 우리 6학년 친구들에게 수능 문제를 소개했다.
내가 국어 영역 시험 문제를 소개한 사연은 이렇다. 졸업을 1주일 정도 남겨 둔 시점에서 중학생이 되기 전에 독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들고 싶었다. 일단 텍스트의 내용이 너무 어려운 문제는 제쳐뒀다. 가령, 국어 영역 31번 문항과 같은 문제들은 모두 뺐다. 대체로 수능 문제는 텍스트의 양이 많고 지문이 길다. 초등학교 6학년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의 텍스트와 충분히 맞출 수 있는 문제를 골랐다. 학생들이 문제를 어렵지 않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능력이 필요하다. 첫째, 주어진 시간 안에 글을 읽고 내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둘째, 주어진 내용을 문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 이 두 가지 능력이 잘 작동한다면 정답을 찾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나는 학습자가 초등학교 6학년 수준임을 감안해 둘째 능력에서는 큰 배려를 했다고 본다. 핵심은 첫 번째 능력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 텍스트를 독해하는 것. 아이들은 문제를 잘 풀었을까?
국어 영역 1번 문항부터 3번 문항까지는 주어진 지문을 읽고 물음에 답을 하는 것이다. 지문을 천천히 읽어보자. 참고로 이 글에 실린 모든 저작권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힌다.
국어 영역의 첫 번째 문제일 뿐만 아니라 대망의 수능 첫 지문인 만큼 쉬운 지문이 출제됐다. 지문은 단순하다. 라디오 방송이다. 나는 지문을 읽는 아이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생각보다 풀만하네?’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이 정도의 지문은 초등학교 6학년 교과서에 실린 여러 갈래의 글보다 이해하기 훨씬 쉽다. 들여다 볼 수 있는 정도의 난이도에 안심한 학생들은 문제에 몰입했다. 아까의 저항과 터져 나왔던 볼멘소리는 자취를 감췄다. 학생들은 문제를 잘 해결했을까?
1번 문항은 재적 인원 22명 중에서 17명이 정답을 찾아냈다. 정답은 ①이다. 진행자는 사연의 내용을 ‘□□ 님은 스스로를 못났다고 생각하는 친구를 돕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신다는 거네요.’ 정도로 정리하고 있다. 또 저도 □□ 님처럼 안타깝다는 공감을 하고 있다. 진행자의 말을 잘 읽었다면 큰 문제없이 해결할 수 있는 난이도다. 수많은 문장 중에서 이 두 문장을 찾아내야 한다. 쉬운 문제이지만 대충 읽어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2번 문항은 글을 큰 틀에서 생각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글을 쓸 때 목차나 개요를 구상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된다. 정답은 ③이다. 지문에서는 유사한 문제 상황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이 문제는 글을 아주 자세히 읽지 않아도 풀 수 있는 문제이다. 문단의 핵심 문장만 읽어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나는 이 문제가 1번 문항보다도 더 쉽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우리 반 학생 22명 중에서 이 문제의 정답을 찾은 학생은 10명에 불과했다.
3번 문항은 3점이 부여될 만큼 학생들에게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이 문제의 정답을 찾은 학생은 거의 없었다. 정답은 ③이다. 텍스트를 정확히 읽지 않으면 정답을 찾을 수 없게 만들어 놨다. ‘청취자 3’은 딸아이에게 긍정적인 면들을 말해줘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의 보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적용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글을 정확히 읽지 못한 학생은 분명 딸아이를 다른 사람으로 넘겨짚을 수도 있다.
1번 문항부터 3번 문항까지 모두 정답을 찾은 학생은 22명 중 고작 1명뿐이었다. 학생들에게 지문이 어려웠는지를 물었다. 다들 쉬웠다고 대답했다. 문제나 보기가 어려웠는지를 물었다. 다들 쉬웠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요인은 무엇인가? 우리는 오랜 생각의 공유 끝에 그것이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은 학생들이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실제로 나는 이 세 문항을 해결하는 데 고작 5분을 주었다. 물론 실제 수험생이라면 이 세 문항에 5분이 할애되는 것이 시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5분은 꽤나 짧은 시간이다. 고등학생보다 훨씬 짧은 집중력과 글에 대한 훨씬 적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초등학생들이, 불과 5분 만에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서 무수히 많은 양의 텍스트를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이제 거꾸로 생각해 보자. 짧은 시간이 텍스트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독서 습관을 가져야 하는 지를 암시한다. 모든 독서는 텍스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전제로 한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를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로 받아들이거나, 「미운 오리 새끼」를 읽고 누가 오리인지, 누가 백조인지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독서가 아니다. 글을 빨리 읽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순 없지만 텍스트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면 그것은 곧 나쁜 읽기이다.
나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마음속으로 글을 읽을 때 말의 속도를 넘지 않도록 지도한다. 즉 글은 직접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속도 안에서만 읽혀야 한다. 이왕 읽는 거 직접 소리를 내어 읽는 것을 권한다. 인간은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고민할 때 은연중에 중얼중얼 거리는 습성이 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글을 쓸 때 꼭 필요한 행동이 아님에도 무언가를 말로 중얼중얼 거린다. 이는 우리가 말을 할 때 곧 생각이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로 초등학교 학생들이 글을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는 것은 매우 훌륭한 책 읽기 방법이다. 책을 잘 읽게 되는 좋은 연습이자 생각이 열리는 창의적 활동이다. 속독이라는 이름 아래 속도가 강조되는 읽기는 독서 교육의 관점에서 빛 좋은 개살구일 수 있음을 명심해야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빨리 읽을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진다면야 좋다. 글을 빨리 읽으면서 텍스트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금상첨화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은 하루아침에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독서는 마치 라디오에 빠져 살았던 내가 라디오 진행자의 지문을 제대로 읽지 않아도 맥락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꾸준히 그리고 성실하게 다양한 책을 읽고 텍스트를 하나하나 이해하는 연습이 뒷받침된다면 글을 읽는 속도도 저절로 빨라질 수밖에 없다. 책은 빨리 읽는 것보다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읽는 게 좋다. 속도에 연연하지 말고 느리게 읽는 책이 주는 여유를 당신이 온전히 누리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