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 국가의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2015 개정 초중등 교육과정 총론의 추구하는 인간상-
2015 개정 초중등 교육과정에서 교육을 통해 추구하는 인간상의 면모를 밝힌 대목이다. 우리 교육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을 길러내고자 한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인간다운 삶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더 나아가 국가의 발전과 인류애를 보편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는 데 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초중등 교육을 이수한 우리 모두에게 되묻고 싶다. ‘당신은 스스로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있는가?’, ‘당신은 민주 국가의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고 있는가?’ 다소 거창한 질문이라 조금은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교육을 통해 길러졌어야 할 올바른 인격과, 그러한 인격들이 더불어 살아가며 만드는 우리 사회의 청사진이 현재의 대한민국에는 존재하는가?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뒤에서 계속 이야기하겠으나 우리의 교육은 반(反)교육적이고 반(反)인간적이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2020년 현재의 대한민국까지 교육의 역사는 이제 100년을 갓 넘겼다. 흔히 교육을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고 한다. 먼 훗날을 내다보고 계획하고 운영해야 하는 뜻이라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교육은 백년이 지났다. 그 결과가 어떠한가? 북에서 탈출하여 남한에 정착한 북한 이주 주민들은 남한을 보고 두 가지 이유때문에 놀란다고 한다. 첫째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잘 살아서. 둘째는 너무 삭막하고 비인간적이라서. <미래 이후>, <노동하는 영혼> 등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 Franco Berardi는 한국 사회의 특징을 네 가지로 규정했다. 첫째는 ‘끝없는 경쟁’, 둘째는 ‘극단적 개인주의’, 셋째는 ‘일상의 사막화’, 넷째는 ‘생활 리듬의 초 가속화’이다(JTBC 차이나는 클라스 147회 김누리 교수 강연 중 일부 인용). 그러니까 한국 사회는 30-50클럽(국민소득 300불 – 인구 5천만 이상)에 속할 만큼 선진국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에는 인간성의 실종, 이기적인 사회, 인간의 기계화로 얼룩져 있다. 우리의 백년교육은 결국 이러한 모습을 양산하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는 실정이다.
1919년부터 약 30년은 일제 치하에서 교육이 이루어졌다. 교육의 목표는 ‘황국신민’양성이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더 나아가 전쟁 통에 국가를 위해 폭탄을 매달고 적진으로 돌진할 수 있는 국민성을 기르는 게 중요한 교육의 목표였다. 당연히 개인의 인격 형성이나 자아실현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개성을 기르는 교육도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사람은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국민’으로 존재해야 했다.
일제 강점기가 끝난 후 군부독재가 시작된다.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암흑기의 교육은 ‘반공투사’와 ‘산업투사’를 길러내는 게 교육의 목표였다. 그 당시의 대한민국은 크게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공산주의의 씨를 말리는 것, 하나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국토와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도덕 교과와 같은 교육과정에는 반공이 강조됐고, ‘교련’과 같은 과목을 통해 학생들은 총검술 등의 군사 기술을 학습해야 했다. 군부독재가 끝난 후 민주정부가 들어선 30년은 사정이 나아졌을까?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군부독재를 종결지었을지언정 자본독재와 멀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독재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가 지금까지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다. 자본독재 사회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경쟁’이다. 지금의 교육은 경쟁하는 교육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수십년 동안 논의되어온 교육의 현안은 무엇인가? 바로 ‘대학입시’다. 대학입시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바로 학생들을 줄 세우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학생들을 서열화하는 것이 비교육적이라는 논의를 하지 않았다. 다만 어떤 방법으로 줄을 세우는 게 공정한지, 얼마만큼의 학생을 1등급으로 인정하는 게 정의로운지를 논의했다. 피말리는 경쟁을 학습한 학생들은 행복한 삶을 상실했다. 청소년들이 구만리의 앞길을 망각한 채 실의에 빠져 오늘도 자살을 택하고 있다. 이것을 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가? 교육은 합법적이고 아름다운 말들로 포장되어 그 본질을 상실한 채 12년 동안 지속적으로 학생들을 괴롭힌다. 인간이 하는 일들 중에서 이만큼 잔인한 일이 또 있던가? 왜, 무슨 이유로, 그 어떤 정치인도 이러한 현실을 바꾸려 들지 않는가? 그들도 이렇게 잔인한 교육환경에서 피를 말리며 공부를 했을 터인데. 그들이 이 레이스의 승자라서 그러한가? 나는 교사로서 통탄을 금할 수 없다.
‘코로나19(covid-19) 바이러스’로 인해 사상 초유의 온라인 개학 시대가 도래했다. 교육과 관련해서 그동안 취약했던 것들이 눈에 띄고 있다. 미래 교육을 강조하면서 교실에는 와이파이 하나 설치가 되어 있지 않았다. 교사의 유튜브 활동에 반감을 샀던 여론이 어제와 같은데, 지금은 거의 모든 교사가 반강제적으로 유튜버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은 교육에 대한 접근성도 떨어지고 있다. 가령 온라인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자재가 부족하다던가, 실시간 화상수업에 내보이고 싶지 않은 주거환경을 조금이라도 노출시켜야하는 부담이라던가, 보호자가 없는 환경이라 온라인 수업에 접근하기 어렵다던가. 이러한 문제들은 비단 감염병으로 인해 발생하는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 교육이 ‘결과의 평등’은 그렇다쳐도 ‘기회의 평등’조차 보장하고 있지 못한 것에 문제 의식을 가져야한다. 소위 ‘조국 사태’로 불붙여진 교육에 있어서의 부모의 세습문제에만 분노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취약계층에 대한 교육 불평등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본의 아니게 감염병으로 인해 강제적으로 실시된 온라인 교육 환경이 우리의 교육 생태계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앞으로의 일들이 궁금해진다.
등교 개학 잠정 연기와 온라인 개학이라는 전례 없는 사태에도 많은 이들이 수능 걱정을 한다. 대입에 필요한 각종 내신 점수를 걱정한다. 이러한 현상은 곧 대학입시가 한 개인의 인생을 좌우하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부의 학원에 대한 휴원 권고 조치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학원들의 불은 밝게 켜져있다. 바이러스로 모든 일상이 멈출지언정, 스카이캐슬에 대한 꿈은 쉴새 없이 꿈틀댄다.
우리의 교육은 왜 이렇게만 가야 하는가? 우리 아이들은 행복해야 할 유년시절과 청소년기를 무엇 때문에 빼앗겨야만 하는가? 학교는 아이들에게 무얼 가르쳐야 하는가? 그것이 경쟁이라면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길래 그래야만 하는가? 그러한 이익은 우리의 삶과 사회의 모습에 바람직한 무언가를 제공하는가? 우리의 교육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가? 교육혁명이 절실히 필요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