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조예은 작가 '칵테일, 러브, 좀비'를 읽고

by 박달리뷰

누군가 좌우명이 있냐고 물어보면 뭐, 비슷한 건 있어하면서 말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은혜와 바꿔야 할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라인홀드 니부어의 기도문에 나오는 한 구절인데요. 예전에 읽었던 칼럼에서 이 구절이 인용된 것을 보고 참 좋은 말이다 싶어 휴대폰 메모장에 저장하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제가 기독교도가 아님에도 이 기도문이 좋다고 느낀 이유는 기도문 속 내용이 나이와 성별, 시대를 떠나 인간이라면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살면서 한 번쯤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번민할 때가 있었을 텐데요. 니부어가 말한 기도문의 메시지와 딱 걸맞은 책이 있어 가볍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조예은 작가의 단편 소설집 '칵테일, 러브, 좀비'에 대한 리뷰입니다.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XL.jpg


칵테일, 러브, 좀비는 4편의 소설이 담겨 있는 단편 소설집입니다. 목에 가시 걸린 여자의 이야기, 산귀신과 물귀신의 사랑, 가부장 아버지가 좀비가 된 가족의 이야기 등 재기 발랄한 내용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에 오늘 소개하는 이야기는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입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독자의 시선을 확 붙잡습니다. 집에 돌아온 세호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살해한 장면을 목격하거든요. 세호의 머릿속에서 기억하는 가장 오랜 시점부터 아버지는 항상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했는데 세찬은 눈치를 채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일 것이라고 말이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좌절의 끝에 선 세호의 머릿속에 목소리 하나가 들려옵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회를 준다고 말이죠. 여기서 작가는 세호가 아닌 스토킹을 당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로 시점을 바꿉니다. 이야기에 풍성함을 더하고 독자가 소설의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놓지 않도록 하는 장치 중 하나이죠.


스토킹을 당하는 영희도 세호처럼 살리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가 좌절하자 또 목소리가 들려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죠.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는 니부어의 기도문과 어울리는 소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지, 바꿀 수 있다고 용기를 내야 할지 분별해야 하죠. 물론, 어머니와 연인의 죽음을 되돌릴 수 있다는 제안을 하는데 침착하고 냉철하게 아니 그런 건 불가능하다며 거절하는 사람은 실제로 많지 않겠죠.


타임 리프를 소재로 한 창작물의 결말은 보통 비슷합니다. 주인공이 기지를 발휘해 과거를 바꿔 만족스러운 미래를 만들거나 반대로 타임 리프 결과 때문에 과거와 미래 모두 최악으로 흘러가는 것이죠. 세호와 영희를 오고 가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도 재미있지만 소설 속의 인물이 나라면 은혜와 용기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지 고민해 본다면 소설을 더 재밌게 감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원작과 드라마

드라마.jpg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는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2023년에 KBS 드라마 스페셜 중 한 에피소드로 제작되었는데요. 소설의 느낌을 잘 살려 만들어 소설을 재밌게 본 분들이라면 다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편 소설을 단편 드라마로 만드는 작업이다 보니 원작 소설과 다른 점이 있는데요. 특히, 영희가 원작과 다른 부분이 많았습니다. 스토킹을 당하는 영희는 불안함, 예민함을 표현하기 위해 대학교 직원들에게 화를 내는 장면을 추가하거나 결말의 방식을 바꾸기도 했습니다.


대신에 원작에서 없어진 장면도 있죠. 찬석을 살리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는 부분이 드라마에서는 분량 때문인지 사라졌습니다. 세호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교도소로 수감되는 부분도 드라마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드라마에서는 현재의 찬석이 망나니처럼 변한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어 있지 않은데 원작에서는 찬석이 변한 이유를 이렇게 서술합니다.


찬석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은 그의 회사가 폭삭 망하고부터였다. 그의 아버지가 힘들게 일구었던 것을 너무 쉽게 물려받은 찬석은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처럼 폭삭 무너지는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소설이나 드리마 모두 완성도 높은 타임 리프 장르물입니다. 취향에 따라 글을 선호하면 원작 소설을 영상 감상을 좋아한다면 드라마 감상을 추천드립니다. 물론 소설, 드라마 모두 본다면 더 좋죠.

작가의 이전글11월에 극장에서 봐야 할 영화 6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