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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Dec 01. 2021

"팀장님, 왜 성추행은 하고 그러셨어요? ㅋㅋ"

소소잡썰(小笑雜說)



"엥? 성추행범으로 몰렸다구? 네가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 A 얼굴에 어딘가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여장부라 해도 좋을 만큼 평소 성격이 한 '걸크러시' 하는 데다 자존심이 강해 웬만한 힘든 상황쯤은 가볍게 웃어넘기는 친구라 웬일인가 싶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A가 털어놓는 얘기를 들어보니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질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다니는 회사 내 한 후배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말도 안 되는 모함을 받았다니 말이다.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며 올곧은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그녀 입장에선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차라리 남직원이 성추행을 당했다고 그랬으면 실수나 오해로라도 '내가 그랬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을 그녀였다. 여자들보단 남자들과 더 격의없이 지내온 그녀 성격 때문이다. 절친을 제외하곤 여자들에겐 오히려 깍듯하다 해도 좋을만큼 예의와 적당한 거리를 지켜온 그녀였다.


다행히 지금은 어느 정도 사건이 일단락됐지만, 처음에 인사팀장 부름을 받고 갔던 길에 그 앞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는 후배 여직원 B씨를 봤을 때 그녀는 자존심이 상해 숨 쉬기도 어려울만큼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여직원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한 회사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그녀 팀에 1년 전쯤 신입 여직원 B씨가 들어왔다. 경력직인데다 제법 나이대가 있는 직원이었는데, 걸핏하면 허언을 일삼고 피해망상적인 행동을 저질러 기존 직원들과 잘 어울리질 못했다. 보다 정확히는 잘 어울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같이 밥 먹자는 직원 하나가 없을 정도로 혼자서만 계속 겉돌았다.


보다 못한 A는 팀장으로서의 책임감도 있고 해서 이것저것 B씨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업무적으로 필요한 부분은 물론이고, 시간이 허락하면 한번씩 밥도 같이 먹어주는 관계가 됐다. 걸크러시한 성격을 가진 탓에 성형이나 미용 같은 게 주된 관심사인 B씨완 취향이 잘 맞지 않았지만, 회사는 일하는 곳이고 자신은 팀장으로서의 역할을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에 비위가 상하는 것도 참아가며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외로운 처지였던 B씨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 좋아하며 A를 곧잘 따랐다. 다른 직원들과는 여전히 물 위에 뜬 기름처럼 겉돌았지만, A 덕분인지 업무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는 그럭저럭 회사 생활도 잘 이어나갔다. 우려되는 게 있다면 엄마 치맛자락 잡고 종종대며 쫓아다니는 어린 아이처럼 팀장인 A 뒤만 너무 졸졸 따라 다닌다는 정도였다.


그러던 중 A는 다른 팀 팀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혼자 남을 B씨가 좀 걱정되긴 했지만, 언젠간 반드시 맞닥뜨려야 할 운명이고 상황이었다. 갓 사회생활 시작한 새내기도 아닌 터에 언제까지나 누가 뒤를 봐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정도 해줬으면 다음 몫은 B씨 혼자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모질다면 모질게 B씨와의 인연을 마무리지은 뒤 A는 새 팀에서 새로운 업무들과 씨름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몇 달 간을 일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예의 인사팀장 부름을 받게 됐다. B씨가 그녀를 성추행범으로 신고했다는 소식과 함께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요,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어쩌구 하는 생각이 순간 머릿 속을 맴돌았다.


인사팀장 앞에서 펑펑 울고 있던 B씨는 A와 삼자대면해 마주앉자 "A팀장이 같이 일할 때 제 가슴을 만지며 성추행했어요"라고 일러바치듯 말했다. A는 '내가? 언제?' 하는 생각에 어리둥절했다. 팀에서 겉도는 B씨가 안스러워 한두 차례 같이 밥을 먹어준 것 외엔 단 둘이 어디서 뭘 해본 적도 없는데 언제 어디서 성추행을 했다는 건지 황당했다. 하도 황당하고 답답한 나머지 인사팀장 앞에서 "나도 가슴 있거든요. 내가 뭐가 아쉬워서..." 하는 낯 간지러운 대사까지 내뱉을 뻔 했다.


양측 말이 엇갈리자 인사팀장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B씨, 언제, 어디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세요. 당시 상황과 관련한 증거나 증인이 있으면 얘기해 주시고요"라고 얘기했다. 그러자 B씨는 "정확한 시기는 기억 안 나구요,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다른 여직원에게 성추행 당한 얘길 하며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상담했었어요. 하지만 그녀는 저보다는 A 팀장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절대 증언은 안 해 줄거에요."라고 대답했다. 이쯤되면 '시체 없는 살인사건'이나 다름 없었다.


A는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는지 곰곰 생각해 봤다. 그 결과 B씨가 자신을 버려둔 채 다른 팀으로 훌쩍 떠난 A에게 분노와 배신감을 느낀 게 아닐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학창시절, 짝사랑하던 선생님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접하면 극심한 배신감에 사로잡혀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과도 같은 뒤틀린 복수심이라고나 할까. B씨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게 아닌 이상 정확한 속내까지야 알 수 없지만, 그런 류의 복수심이 발동한 거란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조사가 거듭될수록 허언증 증상과 피해망상증 징후가 드러나는 B씨의 진술과 A의 평소 견실한 생활태도 등이 맞물리면서 결과적으로 문제의 성추행 사건은 '혐의 없음'으로 종결됐다. 만일 회사 조사가 부실했다거나 편향적이라 판단됐음 B씨가 경찰에 고소한다 어쩐다 난리를 쳤을테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A 입장에선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추행 사건 후유증은 A의 자존심에 적지않은 상처를 남겼다. 그 사건이 있고 난 후 회사 내를 오가다 복도에서 누굴 마주치면 왠지 그들의 눈빛이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회의실이나 사무실에서 누군가와 단 둘이  남는 상황이라도 벌어지면 불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녀를 아는 주변 사람들은 "세상 살다 보면 진흙탕 밟는 일도 있는 거죠. 힘내세요", "누가 뭐래도 난 A 팀장님이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믿습니다" 하고 위로했지만, 그녀는 머리에 털나고 처음으로 사람이 무서워졌다.


A는 "그나마 내가 여자 팀장이고, 평소 성추행은커녕 자존심에 스크래치 날만한 일은 아예 안 하는 성격이라 이 정도로 끝났지. 만일 남자 팀장이거나 평소 스킨십 남발하는 성격이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해"라고 진저리를 쳤다. 성희롱이나 성추행 일삼는 남자놈들이라면 그녀 역시 평소 치를 떠는 성격이었지만, 말도 안 되는 성추행 가해자로 한 번 몰려보니 사람이 꼭 죄를 지어야만 죄인 취급을 당하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얘기를 마무리 지으면서 그녀는 말했다. "근데 이 작가, 그 힘든 상황에서 내게 가장 큰 위안이 돼준 게 뭔지 알아? 성추행 소문이 회사 내에 널리 퍼져 한창 힘들어 하고 있을 때, 후배 여직원 하나가 조용히 내게 다가오더니 '팀장님, 왜 B씨를 성추행하고 그러셨어요? 나도 가슴 있는데 ㅋㅋ' 하고 장난 같은 위로를 건네더라구. 그 말을 듣는 순간 웃음이 빵 터지면서  내가 그동안 인심을 잃거나 잘못 살아오진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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