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우리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다
소소잡썰(小笑雜說)
"삑, 삑삑, 삑... "
아내와 함께 소주 한 잔을 곁들여 요즘 우리 가족 최애 TV프로그램인 <풍류대장>을 취흥에 겨워 보고 있을 때였다. 현관문 쪽에서 이런 난데없는 도어락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누를 사람은 아내와 나, 두 딸 뿐인데, 두 딸은 이날 도서관에서 공부하느라 밤 12시 넘어서나 들어올 예정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재빨리 인터폰 카메라로 현관 바깥 상황을 살펴보려 했다. 그런데 뭣 때문인지 내가 화면을 터치하자마자 갑자기 시스템이 다운되더니 장치가 재부팅에 들어가 버렸다.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더니 몇 년만에 처음으로 인터폰 카메라 한 번 써볼랬더만 이놈의 기계가 때마침 헛발질을 해댔다.
그 사이 성질 급한 아내는 궁금증을 못 참고 현관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는 현관문을 격한 대치 상태로 정체불명의 방문객에게 누구시냐고 물었다. 상대방은 뭐라고 뭐라고 대답을 하는 눈치였고, 아내는 경계심과 단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집 잘못 찾아오셨어요"라며 축객령을 내렸다.
인터폰과 씨름하느라 뒤늦게 아내 뒤를 따라나간 나는 어떻게 된 거냐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우리 아파트 앞 동 사는 부부인데, 자기네 동인줄 알고 잘못 찾아왔대요" 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좀 놀라고 당황하긴 했지만, <풍류대장> 가수들이 들려주는 뼈 떨리는 음악과 소주 몇 잔에 잔뜩 취흥이 올라있던 우리 부부는 이내 그 해프닝을 잊고 말았다.
그런데 다음날 저녁, 퇴근해 집에 들어가는 길에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순간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어제 저녁 일이 문득 떠오름과 동시에 우리집 도어락이 다른 집들 도어락과는 전혀 다른 기종이라는 사실에 뒤늦게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우리 아파트 대부분 세대에 설치돼 있는 오리지널 도어락은 덮개를 위로 올린 뒤 돌출된 버튼을 누르는 아날로그 느낌 제품인 반면, 얼마 전 교체한 우리집 도어락은 덮개나 돌출 버튼이 없는 터치 방식의 디지털 도어락이었던 거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망치로 세게 뒷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알아야 출입할 수 있는 1차 관문이야 광고 전단지 붙이는 사람들도 무시로 출입할만큼 허술하니 앞 동 주민이 우연히 잘못 들어올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모양새는 물론 덮개를 올려야 하는 사용방식과 숫자 버튼까지 판이하게 다른 우리집 현관문 도어락을 자기집인 줄 알고 비밀번호를 눌렀다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다.
뒤늦게 이 소식을 들은 딸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고 했다. 공동현관을 통과한 거라든가, 앞 동 같은 호수 집 앞까지 온거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모양새부터 뭐 하나 같은 구석이라곤 없는 남의 집 도어락을 그렇게 자기집으로 착각해 열려 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현관문을 열고 윗층 올라가는 계단 주변과 복도 센서등, 벽 등을 면밀히 살펴보기까지 했다. 언젠가 언론기사를 통해 현관문 주변에 몰카를 설치해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빈집털이범 얘기를 들은 기억도 나고, 털고자 하는 아파트나 원룸 현관문 주변에 범죄자들이 비표를 남겨놓는다는 괴담도 떠올라서다. 혹시라도 우리집 도어락 비밀번호가 어떤 경로로건 유출된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했다.
결국 우리 가족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문제의 정체불명 방문객은 그들의 주장대로 앞 동 같은 층에 거주하는 같은 아파트 주민일 수도 있겠지만, 안심하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만에 하나 비밀번호가 유출됐다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우리집 현관문이 정체 모를 누군가에 의해 잘못 열려 무슨 피해를 입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집 열쇠와 자동차 열쇠, 사무실 열쇠 등 수많은 열쇠들로 주머니가 무겁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기술 발전에 힘입어 비밀번호와 지문 등 생체정보가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점점 열쇠 없는 세상이 돼가고 있다. 덕분에 일일이 열쇠를 들고 다녀야 하는 번거로움과 주머니 무거움을 덜 수 있게 됐지만, 때문에 열쇠 없이도 범죄자들이 쉽게 남의 집에 들락거릴 수 있는 폐해도 생겨나고 있다. 눈부신 기술 발전이 눈부신 범죄수법 발전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기술 발전을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