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꼴찌 인생도 아름답다
소소잡썰(小笑雜說)
20여년 전 내가 알던 한 사람의 얘기다.
그는 평발이다. 평발의 마라토너다. 그리고 드물게 당당한 꼴찌다.
평발이라 면제 대상이었지만, 그는 군대도 다녀왔다. 그것도 훈련 강도가 엄청 빡세다는 해병대에 자원해 입대했고, 우수한 성적(?)으로 당당히 제대했다. 신체검사에서 자신이 평발이라는 사실을 속인채 해병대에 들어가선 악으로 깡으로 모든 훈련을 악착같이 소화해 냈다.
자격미달임에도 그가 자원씩이나 해가며 굳이 군대를 간 이유는 가족을 위해서다. 농사 짓는 부모님의 넉넉지 못한 형편을 뻔히 아는 터에 아들 둘을 한꺼번에 대학 보내긴 어려울 거란 생각에 공부 잘하는 동생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망치듯 군대로 떠났다. 군대를 제대한 후 그는 한 회사에 취직했다. 88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의 일이다. 그리고 그는 10여년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림이 조금씩 피는 재미를 낙으로 삼으며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열심히 잘 살았다.
그러던 그가 마라톤과 처음 인연을 맺은건 1998년이었다. 그해 3월 직장 인근인 경주에서 동아마라톤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동료들이 장난 삼아 한번 출전해 보라며 등을 떠민 게 계기가 됐다. 당당히 해병대를 제대한 역전의 용사이기는 해도 평발로 마라톤을 뛴다는 건 아무래도 좀 무리일 듯 싶었지만, 왠지 그는 마음이 끌려 참가신청서를 제출했다. 풀코스였다. 기왕 뛸 바엔 풀코스를 뛰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는 집과 회사 간 10킬로미터 거리를 매일 출퇴근 시마다 뛰어 다녔다. 비가 와도 뛰었고, 몸이 아파도 뛰었다. 그렇게 한달여의 연습기간을 거쳐 그는 마침내 생애 첫 마라톤대회에 출전했다. 그가 마라톤대회 풀코스에 도전한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완주를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장난 삼아서라고는 하지만, 대회에 참가해 보라고 그의 등을 떠밀었던 직장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과거에 운동을 했었던 것도 아니고, 특별히 운동에 소질이 있었던 것도 아닌 데다가, 평발이라는 악조건을 갖고 처녀출전에 마라톤 풀코스 완주란 건 사실 너무 무리한 도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그는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해 냈다. 4시간 18분이라는, 기록 축에도 못드는 기록이긴 했지만, 그에게 있어서만큼은 대회 우승과도 맞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록이었다.
첫 대회 출전을 통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큰 성취감과 삶의 희열을 맛보고, 한편으론 자신감을 얻은 그는 이후 마라톤대회가 열린다는 소문만 들었다 하면 귀가 솔깃해지기 시작했다. 직장에 매인 몸이라 시간을 내기가 쉽진 않았지만, 그래도 사정이 허락하는 한은 거의 반드시 대회에 출전하곤 했다. 이후 그렇게 출전한 몇번의 대회에서도 여전히 기록은 4시간대에서 맴돌았지만, 기록 따위는 그에게 있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달린다는 것, 완주한다는 것만이 그에겐 중요했다.
그리고 2000년, 그는 다시 전주-군산간에서 열린 '일생 최악'으로 기억될 전국 마라톤대회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그는 그야말로 최악의 레이스를 펼쳤다. 25킬로미터 지점에서 다리에 쥐가 났기 때문이다. 포기할까도 싶었지만, 완주에 대한 미련이 너무 컸다. 그래서 그는 대회 진행을 돕기 위해 나온 경찰에게 바늘을 빌려 쥐가 난 다리에 피를 내는 응급처치를 한 뒤 다시 일어나 달렸다. 얼마 안가 다시 다리에 쥐가 났지만, 그는 다시 한번 바늘로 다리를 찔러 피를 내고는 또 뛰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 나자, 대회 주최측에서 레이스를 포기할 것을 종용해 왔다. 의욕은 좋지만, 도저히 그 다리로는 무리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뛰었다. 다리에 쥐가 나 레이스가 지체되는 사이 마라톤대회를 위해 임시로 통제됐던 교통마저 풀렸다. 그러다 보니 신호등에 걸리면 그 앞에 멈춰섰다가 다시 뛰고, 다시 신호등에 걸리고를 반복해야만 했다. 몸도, 주변 여건도 모두가 최악인 레이스였지만, 그는 마침내 결승점에 도달했다. 4시간 40분의 기록이었다.
마라톤 완주를 통해 그는 평발이라는 자신의 약점을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완전히 극복해 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일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다만 하지 않으려 들 뿐’이라는게 평발의 마라토너로서 그가 얻은 교훈이다.
“마라톤에서만큼은 일등보다 꼴찌가 더 많은 박수갈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록이나 순위가 이미 물 건너갔음을 알면서도 끝까지 달리는 꼴찌의 자세, 이것이 바로 진정한 마라톤 정신이 아닐까요?”라고 그는 말한다. 그런 그를 보며 나는 마라톤이 좋아졌다. 마라톤대회에서의 꼴찌들이 좋아졌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 싸워 이겨야 할 것은 외부의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