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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사진장이 Dec 23. 2022

예의 없는 것들에게 고함

주차예절에 대한 단상

"이런 된장, 이놈의 차가 왜 이렇게 안 밀리는 거야?"

전날 밤부터 폭설이 내려 출근길 도로 상황도 안 좋을 게 뻔한데, 채 출발하기도 전부터 주차장에서 발목이 잡힌 나는 마음이 급했다. 도로 상태를 감안했을 때 이날은 출근시간이 최소 두 배는 걸릴 거라 예상돼 평소보다 서둘러 집을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내 차 앞에 가로주차된 대형 SUV 한 대가 발목을 잡았다. 처음 밀었을 땐 얼마간 뒤로 밀리던 차가 돌부리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있는 힘을 다해 몇 차례 더 밀어봤지만, 폭설 영향으로 주차장 바닥에 물기까지 흥건한 상황이라 쉽지가 않았다.


더 이상은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다 판단한 나는 차 앞유리에 붙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차주인더러 잠시 내려와 차량을 이동시켜 달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대형 SUV라서 무게감도 남다르고, 폭설 영향으로 주차장 바닥 사정도 안 좋은 만큼 그도 이해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대여섯 차례 벨이 울린 뒤 전화를 받은 대형 SUV 차주는 대뜸 "사이드 풀어놨는데요" 하고 시비조로 나왔다. 사이드 풀어놨으면 네가 알아서 차를 밀어야지, 사내새끼가 돼갖고 차 한 대 못 밀어서 아침부터 재수없게 전화질이냐는 뉘앙스였다.


기가 막힌 나는 "몇 차례 밀어봤지만 차가 안 밀립니다. 폭설 영향으로 바닥도 젖어 있는 상태구요" 하고 불퉁스레 대꾸했다. 그러자 대형 SUV 차주는 뭐라 혼잣말로 궁시렁거리면서 알았다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지나 옷까지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뒤 느릿느릿 자기 차 쪽으로 걸어와 불만스런 표정으로 차를 이동시켰다.


덕분에 바쁜 출근시간에 주차장에서만 10분여나 시간을 낭비한 나는 한층 출근길을 서둘러야만 했다. 전날 내린 폭설로 인해 하얗게 변해버린 도로와 중간중간 복병처럼 숨어있는 블랙아이스는 출근길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마치 내가 자기에게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렀다는 듯 적반하장 화를 내던 예의 대형 SUV 차주로 인한 속 더부룩한 불쾌감은 덤이었다.


회사 출근시간이 빠른 편이라 남들보다 1~2시간쯤 일찍 출근하는 나는 평소에도 가로주차된 차들 때문에 적지않은 불편과 수고로움을 겪고 있다. 간격이라도 좀 여유있게 벌려 주차하면 좋겠건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로주차하는 차들이 많아서다. 그래서 운 좋은 날은 1대, 운 나쁜 날은 3~4대씩 차를 밀고서야 겨우 빠져나오곤 해왔다.


그때마다 '주차장이 협소한 탓이니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살아야지'라고 생각해 왔는데, 오늘 문득 이건 좀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주차장이 협소해 가로주차하는 것까지야 어쩔 수 없다 더라도 그걸 무슨 당연한 권리쯤으로 여기는 무례한 태도가 신경을 잔뜩 건드려서다. 특히 대형 SUV 정도 되는 차는 성인 남성인 나 같은 사람조차 미는 게 힘든 걸 고려하면 차 빼달라는 요청은 사실 당연한 일이요, 아침잠 깨지 말라구 배려하느라 누군가  알아서 밀고 나가주면 깊이 고마워해야 일이지 싶었다.  


"사이드 풀어놨는데 밀면 되지 아침 일찍부터 왜 전화질이냐?", "앞뒤로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뺄 수 있는데 운전을 그것밖에 못하냐?"며 적반하장 화를 내는 차주들이 간혹 있다. 이른 저녁 시간이라 주차장 빈 자리가 여럿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로주차된 다른 사람 차 밀기 싫어서 대뜸 가로주차부터 하고 보는 양심없는 차주들도 가끔 눈에 보이곤 한다. 운전면허 간소화와 함께 뇌도 간소화됐거나 양심도 간소화된 사람들 아닌가 싶다.


가로주차는 권리가 아니라 공동생활하는 이웃들 간에 서로 베푸는 이해와 배려다. 그걸 어느 한 쪽이 당연한 권리나 되는 양 잘못 생각하는 순간 암묵적으로 베풀어 온 서로 간에 이해와 배려 관계는 와장창 깨질 수밖에 없다. 매일 아침 낑낑 대며 가로주차된 차들을 밀고 나가주던 이웃들의 배려가 사라지게 될 거고, 가로주차하고 잠든 다음날이면 누군가로부터 걸려온 빨리 차 빼라는 지랄거리는 목소리로 아침을 맞는 일이 일상이 될 수도 있단 얘기다.


제퍼슨 데이비스라는 19세기 미국의 정치가 양반은 '겸손한 자에게 오만하지 말고, 오만한 자에게 겸손하지 말라'고 말했다. 내 경우에 빗대보면 '무례한 자에게 예를 차리지 말고, 예를 차리는 자에겐 무례하지 말라'쯤 될 거다. 나를 예의 없는 자로 만들려는 무례한 자들에게 고하노니, 공동생활하는 이웃 사이에 얼굴 붉히는 일 없도록 주차예절 같은 기본 중에 기본은 제발 좀 지키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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