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균열의 문장ㅣ10장. 텅 빈 원고

나의 이야기

by 한서

한 달이 지났다.


나는 계속 썼다.


“관찰자”


매일 조금씩.


카페에서, 집에서, 밤에 민준이 잠든 후에.


원고는 50매를 넘어섰다.


나는 은미다.


작가.


하지만 이 소설은 발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건 아라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편집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은미 작가님, 요즘 어떠세요?”


“잘 지내요.”


“새 원고는 어떻게 되셨어요? 에세이 청탁 드렸던 거.”


“아, 그거요.”


나는 멈췄다.


에세이.


“결혼 생활 7년, 여전히 설레는 순간들”


편집자가 원한 주제.


“아직 못 썼어요.”


“아, 그러세요? 마감이 다음 주인데…”


“죄송해요. 조금만 더 시간 주시면.”


“알겠습니다. 기다릴게요.”


전화를 끊었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쓸 수 없다.


결혼 생활 7년, 여전히 설레는 순간들.....


그런 건 없으니까.


나는 노트북을 켰다.


'관찰자' 파일을 열었다.


최근 쓴 부분을 읽었다.


“아라는 SNS에 사진을 올린다.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 ‘오늘도 행복한 하루’라는 캡션과 함께. 댓글이 달린다. ‘행복해 보여요.’ ‘부러워요.’ 아라는 그 댓글들을 읽는다. 그리고 믿으려고 한다. 자기가 정말 행복하다고.”


나는 멈췄다.


이건 아라 이야기인가.


아니면 내 이야기인가.


나도 SNS를 한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사진을 올린다.


카페에서 찍은 커피 사진.


책상 위의 노트북 사진.


“오늘도 글 쓰는 중”이라는 캡션과 함께.


댓글이 달린다.


“작가님 멋있어요.”


“글쓰기 화이팅!”


나는 그 댓글들을 읽는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게 거짓말이라는 걸.


나는 진짜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쓰고 싶은 글을.


민준이 퇴근했다.


여덟 시.


“왔어요.”


“응.”


“저녁 먹었어요?”


“회사에서 먹었어.”


“그래요.”


민준은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나는 주방에 서서 그를 봤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결혼 초에는 달랐다.


연애할 때는 대화가 많았다.


밤새 이야기했다.


꿈, 미래, 사랑.


결혼하고 처음 몇 년도 괜찮았다.


손을 잡고 다녔다.


주말에 데이트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대화가 줄었다.


스킨십이 사라졌다.


우리는 그냥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이 됐다.


“민준씨.”


내가 불렀다.


“응?”


민준은 TV를 보며 대답했다.


“우리 이야기 좀 해요.”


“뭐?”


“그냥… 이야기요.”


민준은 나를 봤다.


“갑자기 왜?”


“갑자기가 아니에요. 우리 요즘 대화를 안 해요.”


“대화 하잖아.”


“형식적인 거 말고요. 진짜 대화요.”


민준은 잠시 생각했다.


“뭐 얘기할 게 있어?”


“있어요.”


“뭔데?”


나는 말문이 막혔다.


뭐 얘기하지?


우리가 멀어졌다고?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그냥 룸메이트 같다고?


“그냥…”


나는 말했다.


“요즘 어때요? 회사는.”


“그냥 그렇지.”


민준이 대답했다.


“바빠?”


“항상 바빠.”


“힘들어요?”


“뭐, 일은 원래 힘든 거지.”


민준은 다시 TV를 봤다.


대화는 끝났다.


나는 포기했다.


밤.


민준은 먼저 잤다.


나는 서재에 앉았다.


노트북을 켰다.


'관찰자' 파일.


나는 새로운 장면을 썼다.


“은미는 남편에게 말을 건다. ‘우리 이야기 좀 해요.’ 하지만 남편은 관심 없다. TV를 본다. 은미는 포기한다. 대화를. 관계를.”


손가락이 멈췄다.


이건 아라가 아니다.


이건 나다.


나는 계속 썼다.


“은미는 작가다. 하지만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건 자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남편과의 관계가 끝났다는 이야기. 외롭다는 이야기. 그걸 쓰면, 인정하게 되니까.”


나는 타자를 멈췄다.


인정하게 되니까.


그래.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다.


내 결혼이 실패했다는 걸.


내가 외롭다는 걸.


다음 날.


나는 아라를 만났다.


계단에서.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아라가 웃었다.


오늘은 화장을 했다.


“어디 가세요?”


내가 물었다.


“은서 언니 만나러요. 친구.”


“아, 그러세요.”


“은미 씨는요?”


“저는 작업하러 카페 가요.”


“글 쓰시는 거죠?”


“네.”


“멋있어요. 저도 글 쓰고 싶은데.”


아라가 말했다.


“뭐 쓰고 싶으세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제 생각들?”


아라는 웃었다.


“근데 쓸 용기가 없어요.”


“왜요?”


“쓰면 진짜가 될 것 같아서요.”


나는 그 말에 멈췄다.


**쓰면 진짜가 될 것 같아서.**


“무슨 뜻이에요?”


“그냥요.”


아라가 말했다.


“생각으로만 있으면 애매한데, 글로 쓰면 확실해지잖아요.”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무서운 거예요?”


“네.”


아라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확실해지는 게 무서워요.”


카페에 앉았다.


2층 창가 자리.


노트북을 켰다.


'관찰자' 파일.


아라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쓰면 진짜가 될 것 같아서요.”


“확실해지는 게 무서워요.”


나도 그랬다.


쓰면 진짜가 된다.


내 결혼이 실패했다는 것.


민준과 나의 관계가 끝났다는 것.


나는 외롭다는 것.


쓰면 부정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나는 썼다.


손가락이 움직였다.


“은미의 남편 민준은 회사원이다. 안정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안정적이지 않다. 아니, 관계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들은 그냥 같은 집에 산다. 같은 침대에서 잔다. 하지만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은미는 그걸 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쓴다. 아라의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 그것도 자기 이야기다.”


“관찰자는 언제나 자기 그림자를 함께 기록한다.”


나는 타자를 멈췄다.


눈물이 났다.


왜냐하면 이게 진짜이기 때문이다.


쓰니까 진짜가 됐다.**


나는 울었다.


카페에서.


조용히.


사람들이 볼까봐 고개를 숙이고.


나는 외롭다.


민준과 나는 끝났다.


오래전에.


나는 작가지만 쓰고 싶은 글을 쓰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건 내 이야기이고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 썼다.


그러니까 이제 진짜다.


집에 돌아왔다.


민준은 아직 안 왔다.


나는 서재에 앉았다.


노트북을 켰다.


'관찰자' 파일.


원고는 80매가 넘었다.


나는 제목을 바꿨다.


'관찰자' → '균열의 문장'


그리고 새로운 챕터를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세 명의 여자에 관한 것이다.”


“아라. 건축가의 아내.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관계.”


“은서. 변호사. 불가능한 사랑.”


“은미. 작가. 관찰자. 하지만 결국 자기 이야기를 쓰는.”


나는 타자를 멈췄다.


이게 내 소설이다.


발표할 수 없는.


하지만 쓸 수밖에 없는.


밤.


민준이 들어왔다.


열 시.


“왔어요.”


“응.”


“저녁은?”


“먹었어.”


민준은 샤워하러 갔다.


나는 서재에 남아 있었다.


노트북을 봤다.


'균열의 문장'


80매.


나는 저장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걸 끝까지 쓸 수 있을까.


세 여자의 이야기를.


아라의.


은서의.


그리고 나의.


민준이 샤워하고 나왔다.


“아직 안 자?”


“곧 잘게요.”


“일찍 자. 늦었어.”


“네.”


민준은 침대로 갔다.


나는 서재에 남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을 봤다.


커서가 깜빡였다.


나는 계속 쓸 것이다.


발표하지 못해도.


왜냐하면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니까.


쓰는 것.


관찰하는 것.


그리고 인정하는 것.


내가 외롭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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