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서 일어난 지 며칠 만인지 세어보지 않았다. 세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욕실 문을 열었다. 타일이 차갑다. 발바닥에 닿는 냉기가 오히려 반갑다.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아서.
물을 틀었다. 처음엔 미지근하게, 그다음엔 뜨겁게. 견딜 수 있을 만큼만 뜨겁게. 물줄기가 머리카락을 적신다. 샴푸 거품이 두피를 타고 흐른다. 손가락 끝으로 두피를 문지른다. 머리카락 사이사이, 구석구석. 거품이 불어난다. 하얗고 부드러운 거품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발가락까지. 하나하나. 엄지발가락, 검지발가락, 가운데발가락, 약지발가락, 새끼발가락. 발톱 밑까지. 때가 벗겨진다. 회색빛 찌꺼기들이 물과 함께 배수구로 흘러간다.
귀를 닦는다.
면봉을 귀에 넣는다. 천천히 돌린다. 귀지가 묻어 나온다. 더러운 말들이 함께 빠져나오는 것 같다. “네가 뭘 안다고”,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미안해, 노력할게. 다시는 안 그럴게” 거짓말들. 면봉을 바꿔 끼운다. 다시 넣는다. 조금 더 깊이. 시원하다. 귓속이 텅 빈 것처럼 후련하다.
이를 닦는다.
칫솔모가 치아를 훑는다. 위아래, 안쪽 바깥쪽. 어금니 사이사이. 잇몸과 치아가 만나는 경계선까지. 거품이 입안 가득 찬다. “사랑해”, “믿을게”, “네 탓이야” 내가 뱉었던 말들, 삼켜야 했던 말들이 거품과 함께 섞인다. 혀를 닦는다. 혓바닥 깊숙이, 목구멍 가까이까지. 헛구역질이 날 것 같지만 참는다. 끝까지 닦아낸다.
입을 헹군다. 물을 머금었다가 뱉는다. 한 번, 두 번, 세 번. 입안이 개운하다.
물을 끈다.
고요하다. 물소리가 사라진 욕실은 축축하고 따뜻하다. 거울이 김으로 뿌옇다. 손으로 닦아낸다. 거울 속에 누군가 있다. 나다. 젖은 머리, 붉은 얼굴, 맨얼굴의 나.
수건으로 몸을 닦는다. 물기를 톡톡 두드려 흡수시킨다. 옷을 입는다. 깨끗한 옷. 오늘 아침에 빨아놓은 옷.
부엌으로 간다. 냉장고를 연다. 바나나 우유. 노란 병을 꺼낸다. 차갑다. 뚜껑을 딴다. 한 모금 마신다. 달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시원하고 달콤하다.
창밖을 본다.
햇빛이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