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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버 Jan 13. 2019

행복을 찾아서

영화 '일일시호일' 시사회 리뷰

나는 어쩐지 행복하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다. 그렇게 안되면 안되는데 자꾸만 잘 안된다. 이 마음은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행복'을 생각하면 잘 익은 곶감처럼 달큰한 상상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 속에 나는 없다. 제철에 제철 음식을 챙겨먹을 만한, 부모에게 얹혀 살지 않아도 될 만한, 한푼 두푼 모아 몇 년에 한 번씩은 여행을 다녀올 수 있을 만한 돈, 돈, 돈. 그것만이 머릿 속을 가득 메운다. 아니, 어쩌면 돈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꽤나 까다로워서 얻기까지엔 많은 돈과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또, 그걸 얻기 위해서 지금의 나는 힘들고 외로워도 일을 해야 한다.


 행복은 늘 그렇게 유보된다.
우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들이고,
일을 하면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면 나는 죽을 때까지 행복하지 못하는 건가. 또 다시 마음이 꼬인다.


새삼 행복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봤다.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나온다. 정말 그렇다면, 행복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금세 증발해버리는 한낱 감정이기 때문이다. 전철을 탔을 때 눈앞에 자리가 난 그 순간, 티라미수 케익을 한 입 베어문 찰나의 그 순간에 드는 마음이다. 그 마음의 시간은 몇 초, 길어야 몇 분이다. 영원한 행복을 바라는 것보다 영원한 권태를 바라는 편이 낫겠다. 우습게도, 단어의 정의는 피곤한 내 삶에 대한 그럴싸한 변명거리가 됐다.


다케다 선생

*스포일러 있습니다.


20살 대학생 노리코가 있다. '나 좀 한다' 하는 일도, '이거 아니면 안돼' 하는 일도 없다. 철저하게 애매한 존재다. 그래서일까. 노리코는 '다케다씨는 인사만 해도 보통 사람이 아니더라'는 엄마의 속삭임이 흥미로워 사촌 미치코와 함께 그에게 다도를 배우기로 한다. 다도는 그렇게 그의 세상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하지만 다도는 생각보다 더 복잡다단하다. 어떤 발을 먼저 내딛어야 하는지, 어떤 손으로 문을 열어야 하는지, 어떻게 물을 떠야 하는지까지 정해져 있으니, '이건 지나친 형식주의가 아닌가요!'하고 내뱉는 미치코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다케다 선생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틀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 마음을 담는 것'이라고 말한다.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손에 익히라고, 그러다보면 삶의 리듬이 몸에 밴다고.

족자를 바라보는 노리코

온통 초록빛이었던 20살의 여름을 지나온 그들은 어느 새 돈을 벌어야 마땅한 나이가 됐다. 미치코는 바라던 대로 회사원이 되고 아내와 엄마가 되었지만, 노리코는 여전히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남아있다. 물론, 그 사이에 결혼할 뻔한 연인과 헤어지기도 하고 사랑하는 아빠를 떠나보내기도 한다. 원래 삶의 모든 것들은 그렇게 갑작스럽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늘도 다도를 한다. 지금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에 오롯이 집중하다보니 싫지도 좋지도 않은 다도를 강산이 바뀌는 동안 붙들고 있다. 따듯한 물의 뭉근한 소리와 찬물의 경쾌한 소리가 다르게 들리고, 족자 속 글에 감응하고 계절을 온몸으로 감각하기 시작한다.

'일일시호일', 매일매일 좋은날이라는 뜻이다. 복에 겨운 나날이 아니라, 삶 속으로 가차없이 들이닥치는 세파에 몸을 맡길 수 있는 하루하루가 좋다는 말이다. 여름엔 작열하는 햇빛을 받아보고, 소슬한 가을에 쓸쓸해져보기도 하고, 겨울엔 베일 듯한 칼바람에 오들오들 떨어보기도 하는 것. 계절과 마음의 결을 느낄 수 있는 오늘이 좋다는 말이다.

다도

다케다 선생은 '늙어보니 세상의 것들을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겠다'라고 말했다. 가늠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가늠할 수 있는 것들은 그저 흘러가게 놔두면 되는 것이고, 도대체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랬다. 노리코에게 있어서 행복은 가늠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세월이 켜켜이 쌓여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것이 되어야 어렴풋이 알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행복하자'라는 생각을 안하면, 행복해질 것도 같다.

'행복해져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밥을 잘 먹는 것, 잘 자는 것, 좋아하는 사람과 잘 지내는 것에 몸이 익숙해지는 일. 이것이 그 어렵고도 다정한 '행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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