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버 Dec 24. 2018

'소외된 자'들의 참 우정

[브런치 무비패스] 영화 '그린 북' 리뷰

금 이빨 빼고 모조리 씹어먹을 것 같은 토니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의 '떠벌이' 토니. 허풍떨기와 주먹 날리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처세왕이다. 그런데 이 남자한테도 반전은 있으니, 바로 몹시 가정적이라는 점. 아내와 두 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해서 (다수의 남편, 아빠들이 그러하듯이) 그 어떤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단 하나, '유색인'과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 빼고.


그렇다. 그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아내가 집에 배수관을 수리하러 온 흑인들에게 물을 준 컵을 더러운 양말을 집듯 엄지와 검지만을 이용해 가차없이 쓰레기통에 버리는가 하면 평소에도 인종차별 발언을 서슴치 않고 내뱉는다.


하지만, 살다보면 본인이 가진 가치관이 통째로 흔들리는 순간이 온다. 그건 바로, 돈이 궁할 때.

가족에게 헌신적인 그에게 돈이란 가족 다음으로 소중한 것이기에 돈 앞에서 '괴팍한 토니'는 없다.

볼륨 좀 낮추지 그래요?

그렇게 시작된 돈 셜리 박사와의 인연. 셜리는 세계적으로 저명하지만, 한없이 외로운 피아니스트다. 1960년대 당시 미국은 TV와 같은 매체가 보편화되어있지 않았기에 유명세 좀 탔다 하는 아티스트들은 발품을 팔아 전역을 투어해야 했다. 셜리 역시 마찬가지여서 운전기사와 매니저 역할을 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마침 그 바닥에서 '떠벌이'로 유명한 토니가 눈에 띄었고 그를 고용하기로 한다.


하지만 면접부터 순탄치 않다. 아무리 토니가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하지만 하필이면 고용주가 유색인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일단은 하기로 한다, 매니저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수발 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지금이야 토니의 행태가 금기시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그 당시에는 백인 우월주의와 더불어 유색인 인종차별 풍토가 지금보다 더 만연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한다. 이 출발점에서 시작해야 뒤이어 나올 이야기들이 더욱 따뜻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비즈니스 파트너 관계가 시작되었다. 고상하고 도덕적인 셜리에게, 산만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토니의 행동들은 자신이 평생을 꾸려왔던 상식 밖의 일이다. 길가 가판대 아래에 떨어진 옥석을 훔치는가하면,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무려 '손'으로 짚어 게걸스레 먹고 뼈다귀는 창문 밖으로 휙- 버리는 모습에 셜리의 입은 하루가 멀다하고 떡 벌어진다.


반대로, 셜리의 행동 역시 토니의 속을 뒤짚어놓는다. 쓸데없이 무게를 잡는 것 같기도 하고 융통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무엇보다 미국 남부의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인종차별을 당하면서도 참고만 있는 꼴을 보자하니 어딘지 모르게 울화가 치민다. 우정은 이 때부터 시작된다.


우정은 별 다른 게 아니다.
누군가의 슬픔을 가십거리로 소비하지 않고
같이 웃고 울어주고, 같이 화내주는 것이 전부다.  
이렇게 받아적어요.

그러나 계속해서 속만 끓이고 있는 셜리가 안쓰러운 토니는 이윽고 화를 참지 못하고 성을 낸다. 상대방의 인생을 살아보지 않은 이상 그 삶의 결은 온전히 읽을 수 없는 법이다.


셜리는 1960년대 미국의 흑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그 어떤 해결책 하나 마련해주지 못한다는 것 역시 잘 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참고 또 참는다. 품위만이 폭력을 이길 수 있다는, 품위만이 진정한 승리의 깃발을 꽂을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여러번 그들 사이에 폭풍이 휘몰아쳤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의 단점을 솔직하게 지적하고 그 균열 속에서 둘을 이어놓을 다리를 만들려고 무척이나 애를 쓴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예쁘게 표현하는 방식을 모르는 토니에게 아내 돌로레스에게 한없이 로맨틱한 편지를 대신 써주는 셜리와 세상이 당연시하는 무자비한 차별에 무작정 참지 않고 해결하는 방식을 알려주는 토니.

세상으로부터 늘 배제되고 소외된 사람들이라, 외로움이 무엇인지 뼛속부터 절감해 온 사람들이라 우정의 씨앗을 한 움큼 틔울 수 있었다. 인종과 사회적 위치,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친구가 되는 법은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끊임없이 부딪혀보는 것 뿐이다.


토니와 셜리, 셜리와 토니. 이 둘의 우정을 내 삶으로 오롯이 가져와 녹여낼 수만 있다면.

매거진의 이전글 상처를 대하는 다정한 자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