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버 Sep 03. 2018

상대방의 역사를 마주한다는 것

[브런치 무비패스] 영화 '체실 비치에서' 리뷰

출처: 네이버 영화

*스포일러 있습니다.


1962년 영국, 플로렌스와 에드워드는 오늘 막 결혼을 했다. 그 당시 보통의 연인들이 그러하듯, 교회에서 나지막이 손을 들고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렇게 사랑을 맹세했다. 그리고 곧바로 체실 비치의 작은 호텔로 낭만적인 신혼여행을 떠났다. 호텔 디너 서비스를 신청해 격의 있는 식사를 하려고 하지만, 각자 다른 이유로 플로렌스와 에드워드의 눈동자에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메마른 공기를 가득 메우는 건 작지만 가쁜 숨소리,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옆에 있는 누구라도 알아챌만한 다리의 떨림이다. 어렵사리 식사를 마치고 둘은 식탁 뒤에 놓인 침대를 향해 걸어간다. 그렇게 신혼여행의 첫날밤을 보내려던 찰나, 플로렌스는 과거의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채 벙찐 에드워드를 뒤로하고 호텔 밖으로 뛰쳐나간다.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는 1962년 결혼식 당일, 그리고 그들이 만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중주단을 만들겠다는 호기로운 꿈을 가진 플로렌스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에드워드는 핵무기 반대 모임에서 처음 마주한다. 운명적으로 서로에게 끌린 이들은 상대방을 보다 깊게 알아가기 시작한다. 플로렌스는 에드워드의 유일한 슬픔인, 뇌손상을 입은 그의 어머니를 다독이고 에드워드는 플로렌스의 꿈을 응원한다.


그러나, 어떠한 관계든지 간에, 나의 아픔이 누군가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으로 비칠 때 관계는 틀어지기 마련이다. 에드워드는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 플로렌스의 행동을 통해 미루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곪아있는 그녀의 슬픔을 마주하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플로렌스는 과거에 성폭행을 당했다. 그로 인해 남성이 자신에게 손을 대는 것을 극도로 부정하고 공포스러워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1960년대. 그 누구도 겪어서는 안 되는 사건을 겪었음에도, 성폭력 피해자임을 '여성' 본인의 입으로 말하는 것이 거의 금기시되던 시대. 아무리 씩씩한 플로렌스라고 해도 사회적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그토록 사랑하는 에드워드에게조차 자신의 환부를 보여주지 못했다. 함께 미래를 그리는 사이라고 해도, 각자가 살아온 역사의 한 조각에 의해 그 미래는 찢어진다.

출처: 네이버 영화

그럼에도, 플로렌스는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보수적이고 엄격한 집안에서 숨죽여 이른바 '섹스 지침서'를 읽고, 다른 여성과 잠자리를 가져도 좋으니 같이 살자고 할 만큼 에드워드를 끔찍이 사랑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그가 생각하기에 당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자신에게 모멸감을 준 플로렌스에게 비수가 되는 말들을 쏟아붓고 그녀의 손을 쳐낸다. 그렇게 이들은 결혼한 지 6시간 만에 파혼한다.


그로부터 1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레코드샵에서 일하던 에드워드는 척 베리의 앨범을 찾는 한 소녀를 만난다. 그 소녀는 무심코 척 베리의 노래는 통통 튀고 흥미롭다는 말을 내뱉는다. 정확히 10여 년 전 플로렌스가 한 말이다. 이에 에드워드는 젊은 날의 사랑의 상실에 대한 회한에 잠기고, 몇십 년이 지난 2007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중주의 고별 공연에 찾아가 바이올리니스트와 마지막으로 눈을 '글썽인다'. 아마도 그 바이올리니스트는 비로소 자신의 아픔을 마주하고 그것을 함께 바라봐주는 다른 사람을 만났겠지.


상대방의 역사를 마주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약속하는 것만큼이나 공허한 일은 없다. 이것이 '체실 비치에서'를 통해 느낀 최후의 감상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쩌다 가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