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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버 Sep 18. 2018

나는, 나와 연애한다.

영화 '후아유 (Who Are u?)' 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2002년, 여의도 빌딩 숲 한복판 63빌딩. 지형태는 30층에서 '후아유'라는 이름의 채팅 게임을 런칭하기 위해 베타 테스트를 하고 있고, 서인주는 지하 1층 아쿠아리움에서 다이버 일을 하고 있다. 형태는 '후아유' 게시판에서 '조악한 아바타, 엉성한 배경, 이걸로 오픈할 건가요?-_-'라며 당돌한 비평을 한 닉네임 '별이'를 본다. 순간 짜증이 난 형태는 '별이'가 63빌딩 아쿠아리움에서 일하는 인주임을 단번에 알아내고, 게임에 대한 인터뷰를 요청할 겸 찾아간다. 인주는 형태에게 인터뷰에 응한 댓가로 자신의 인어쇼를 촬영을 부탁하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열심히 헤엄을 친다. 지나치게 열정적인 인주의 모습에 놀란 형태는 그가 더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인주는 3년 전까지만 해도, 국가대표 수영선수로 굵직한 대회에서 상을 거머쥐는 수영계의 루키였다. 하지만 과다한 욕심으로 무리를 하다가 결국 청력에 손상을 입게 되면서 한순간에 선수생활의 막을 내린 불운의 선수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남자친구(무려 박해일..)마저 유학길에 올라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게 된다. 그러던 중 '후아유'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익명의 '멜로'를 알게 되면서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로 유명한 티티카카 호수에서 언젠가 한번 수영을 하고 싶다는 수줍은 고백을 할만큼, 온전하고 순수한 마음을 작은 채팅창 안에 내보인다.

하지만, '멜로'는 다름 아닌, 형태다. 인주가 '별이'임을 알게 된 후 호기심 반 진심 반으로 시작한 대화, 그 안을 가득 채운 마음은 갈수록 짙어져만 간다. 그러나 동시에 '멜로'가 형태라는 것을 모르고 그 가상의 캐릭터에 갇혀 환상을 가지는 인주를 보면서, 갈등 역시 커진다. 참다못해 형태는 '별이'에게 대학로 티티카카에서 만나자고 제안하지만, 결국 그 앞을 서성이다 올 뿐이다. 오히려 그 자리를 지킨 건 인주다. '형태'가 아닌 '멜로'를 원하는 인주 앞에 나타나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현실 속 자신의 모습이 인주의 환상 속 '멜로'의 모습과 다를 경우 그녀가 느낄 괴리감과 회의감, 분노, 자괴감 등을 염려한 탓이다.

인주는 다이버 일을 그만두기로 한 날, 마지막 인사를 건넬 겸 형태를 찾아간다. 말그대로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일까, 형태는 자신의 아지트 63빌딩 맨 꼭대기 층에 인주를 데려가 바탕화면 휴지통에 여러 번 구겨넣었을 자신의 은밀하고도 애틋한 마음을 이야기한다. 인주는 '멜로'에게 바람맞은 아쉬움을 떨치려는 듯 형태의 고백을 받아주지만, 그날 밤 미련의 끝자락을 놓지 못해 '멜로'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대학로 티티카카에서 다시 한번 만나자고. 이 모습에 화가 난 형태는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끝내 인주 앞에 나타난다.


황망함을 감출 수 없는 인주는, 언제나 그랬듯, 추운 겨울의 도심을 헤치며 정신없이 도망친다. 형태는 첫 번째 만남때처럼 같이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인주를 따라간다. 3년 전 사고로 안으로, 안으로만 깊숙이 들어가는 습관을 체내화한 인주를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듯 결연한 발걸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뒤쫓아간다.


무려 16년 전 이제 막 인터넷을 하는 사람이 천 만명을 넘던 2002년의 이야기지만, 어쩐지 지금 2018년의 내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젊은 우리는 나 자신과 연애한다. 자신의 상처를 이해해줄 '나와 비슷한 누군가'를 찾으면서도, 막상 그 사람이 현실로 다가오면 자신이 생각했던 모습과 다를 것을 미리 두려워해 뒷걸음친다. 타인을 사랑한다기보다 나의 이러한 모습까지 사랑해줄 '또 다른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영화 '후아유'는 우리의 이토록 이기적인 모습을 저 높은 63빌딩에서 관망하듯 보여주며 가슴 한 구석을 날카롭게, 혹은 로맨틱하게 콕 찝어주는, 잘 알려지지 않은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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