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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버 Sep 18. 2018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브런치 무비패스] 영화 '명당' 리뷰

*스포일러 있습니다.


때는 조선 후기,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왕권은 추락하고 세도정치가 판을 치던 격동의 시기. 땅의 기운을 느끼고 그곳의 미래를 점치는 천재지관 박재상은 흉지에 왕의 묏자리를 보는 김좌근 세력을 저지하다가 그날 밤 아내와 자식을 눈앞에서 잃게 된다. 그로부터 13년 후, 비루한 헌종의 왕실을 능멸하고 조선을 쥐락펴락 하는 장동 김씨 가문의 독주를 막고자 하는 재상 앞에 흥선이 나타난다. 흥선은 일부러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상갓집의 개'를 자처하지만, 사실은 매일매일 왕실을 다시 일으킬만한 기회만을 노리고 있는 진정한 '사냥개'다. 재상은 흥선을 장동 김씨 가문에 의해 혼란스러워진 정국을 안정시킬 인물로 여기고 뜻을 함께 하기로 한다.

서슬퍼런 눈빛의 김좌근

그러던 어느 날, 흥선과 장동 김씨 가문은 '이대천자지지' 즉, 2대에 걸쳐 왕이 난다는 명당 중의 명당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재상은 그저 소문일 뿐 사실이 아니라며 절대 휘둘려서는 안된다고 만류하지만, 당장이라도 왕실을 재건해야한다는 절박한 강박은 흥선의 귀를 막고 눈을 멀게 한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고 하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걸까, 독사같은 지관 정만인이 파리같은 목숨을 부지하고자 충북 예산 가야사지가 바로 그 '이대천자지지'라는 말을 흘린다. 조선의 권력을 잡기 위해 몸의 모든 감각을 깨운 김병기(김좌근의 아들)와 흥선은 그곳으로 달려가고, 마침내 서로를 향해 선연하고도 비릿한 피가 묻은 칼날을 겨눈다.

곧 눈 앞에 펼쳐질 영광을 위해 눈을 부릅 뜨고 있는 흥선

'창을 낼 때는 바람과 해가 잘 드는 남향으로', '잘 때는 북쪽을 피해 베개를 두고', '중요한 건물을 지을 때는 산을 등지며 물가를 바라보는 곳에'. 선언적인 문구와도 같은 이 말들은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암묵적인 규칙으로 통용된다. 미신에 불과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무시하자니 어딘가 찜찜한 이 '규칙'들은 지극히 사적인 마음의 공간에까지 들어앉는다. 좋게 말하면 자연과 인간과의 조화, 나쁘게 말하면 자연에까지 인간의 탐욕이 투영되어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멀리 관망하는 듯하지만 그 누구보다 가슴 뜨거운 박재상

처음에는 사람이 공간을 만들지만, 그 공간에 사람이 들어가게 되면 어느 새 상황은 역전되어 그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그 때부터 자리는 단순한 지리적,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뛰어넘어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역할까지 맡게 된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욕망이 압축되어 이리저리 헝클어질대로 헝클어져있는 형태로 말이다. 때로는, 김병기와 흥선이 그러했듯, 권력 투쟁의 장이 되기도 한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옮겨가면서까지 살아있는 자의 욕망을 채워주는 전장으로 변모한다.


여기서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과연 박재상은 그 욕망으로부터 한 발 물러나 있는, 한없이 '정의롭기만 한' 인물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역시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흥선을 곁에 둔, 조선의 미래를 자신의 바람대로 끌고 가길 원했던, 똑같은 인간이다. 그러나 재상에게는 욕망보다는 열망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 김병기와 흥선에 비해 비교적 건강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다른 세상을 원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영화 '명당'은, 춘추전국시대 뺨치는 혼돈의 조선 후기의 숨겨진 단순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아니라 시공간에 국한되지 않는 인간의 조잡하고 추악한 욕망을 '스펙터클하게' 담아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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