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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Mar 09. 2022

오히려 좋아

생채기들이 나아진다면 

네 번째 대학 학기가 시작되었다. 복수전공을 하는 탓에 5개의 학기를 지나, 올해 말쯤이면 드디어 스트레이트로 졸업이다. 내년에는 학사가 세 개가 된다. 첫 대학교도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스트레이트로 졸업했었는데, 호랑이 아빠 덕에 휴학은 고려해보지도 못했다. 내가 선택해서 하겠다는 공부는 변명이 없다. 그저 해야 한다는 명분뿐, 그래서 스스로 세운 계획은 꽤나 무섭다.




이번 학기에는 제일 좋아하는 '김문 교수님'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항상 내 생각을 내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고 하신다. 얼마나 내 방식으로 내 생각을 푸는지에 맞춰 평가할 거라고도 하고, 교수님의 이야기는 의견일 뿐이라고도 한다. 우연히 듣게 된 저번 학기 수업은 정말 스트레스받을 정도로 너무 어려웠지만, 스스로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게 되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낸 시험지는 뿌듯했고, A+도 받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관찰하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했다. 정해진 답을 시간 내 암기하고 명확히 써야 하는 규칙적인 과목들은 항상 힘들었다. 당연히 학생 때는 학교를 다니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공부가 아니라 규제들과 매번 똑같은 친구들을 반에서 만나야 한다는 게 고통스러웠다. 지금도 외국어 과목들은 지루해서 잘 버티지 못한다. 엉덩이로 하는 공부들에 자신 없다고나 할까.




성인이 되고, 내가 선택해서 한 공부들은 진심으로 자유로웠고 재미있었다. 남들은 눈 벌게지도록 돈을 벌고, 성취를 벌고 뽐내고, 비트코인과 주식을 공부하며, 그저 열심히 앞으로만 사회에서 나는 당장의 대가는 없지만 아름다운 것들이 좋았다. 우리 아빠는 나보고 '돈 안 되는 건 다 잘해요'라고 말하곤 했다. 취업이나 자격증은 모르겠고, 오늘 다시 만난 김문 교수님의 수업은 그저 순수하게 재밌었다.




엊그제 양가 어른들의 술자리에서, 엄마는 그깟 미술 재수 뭐라고, 시켜줬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미안하다고 했다. 요즘 엄마는 그 말을 자주 꺼내곤 했다. 최근에 본 스물다섯스물 하나 드라마에서 나희도가 딱 펜싱을 좋아하는 그만큼, 그 당시의 나는 미술을 열렬히 좋아했다. 그 드라마를 보면 과거의 내가 많이 생각난다. 아직 몇 화 못 봤지만, 그녀는 정말 그 길을 끝까지 걷길 바란다.




사실 엄마가 안 시켜줘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에게 실망해서였다. 수많은 울음과 자괴 속에서, 어쨌든 상처는 치유되었고 나는 더 단단해졌다. 그래서 지금은 진심으로 웃으며 넘길 수 있다. 지금 그만큼은 아니지만 난 여전히 미술이 좋고, 꾸준히 하고 있다. 가끔은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도 든다. 덕분에 하고 싶은 것들을 치열하고 깊게 고민할 수 있었던 20대를 보냈으니까. 내  20대는 진짜로, 하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살았다.




살면서 많은 생채기는 난다. 곪아버릴까, 나아버릴까만 선택할 수 있는 거지. 이미 벌어진 일을 세상만 탓해서 뭐하겠는가. 일반적이지 않은 성격에 고향 바닷바람 같은 차갑고 뾰족한 말투, 뭐 따지면 안 그런 사람 어디 있겠냐만 살면서 생채기가 참으로 많았다. 그 생채기가 모두 나아버린 탓에 이제는 어디 가서 기죽을 일도 없다. 스스로 단단하다는 생각이 요즘은 진심으로, 참으로 많이 든다.




돈이라는 것을 벌기 시작했고,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을 다해 살았던 나의 20대. 0원에서 빛을 내나 어쩌나 온전히 우리의 힘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도 마련했다. 김문 교수님 말대로 진짜로 나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표현했던 폭풍 같은 시기였었다. 이제는 조금 감이 오려나 싶으니, 뭘 해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든다. 나라는 뒷배가 아주 단단한 기분이랄까.




그러니까 이제는 어떤 생채기가 오더라도 오히려 좋아할 준비가 됐다. 싫어하던 공부들을 억지로 버티던 학생은 이제 필요와 상관없이 공부를 즐기는 성인으로 컸다. 상처들은 나를 억지로, 계속해서 나아가게 한다. 일상의 작은 스텝들은 총체적인 나를 이루게 한다. 그 걸음들은 모이고 모여 더 깊숙한 뿌리가 되겠지. 더 단단한 나를 만들어주겠지. 그러니까 오늘은 오늘의 걸음을 걷는데 집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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