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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Apr 03. 2020

벌써 다섯 번째 회사  

초봄의 여수에서, 박약 독백 



사람들은 전공에 무슨 환상이 있는 걸까. 문화 쪽으로 발을 딛고, 이래 껏 전공하지 않았는데 그림을 잘 그리는 애로 불러왔다. 국어교육과라는 단일 전공은 문화 쪽에서 아무런 특기를 살릴 수 없었고, 사람은 종종 국문과와 헷갈려했다. 다행히 기대하는 정도의 독서는 하고 사업계획서는 쓸 줄 알았다. "여자 직업으로는 선생이 최고야, 임고는 왜 준비 안 해?"와 같은 질문은 해마다의 이직을 거치고, "약이는 00만 빼면 완벽한데."라는 상사의 말에 "사람이 어떻게 장점만 있어요? 다 장단이 있는 거지." 정도의 반박을 바로 할 정도로 입이 야물어지고 나서야 들어갔다. 




열심히 살았는데 뭔가 뾰족해지지 않는 기분은 아무래도 불유쾌하다. 어떻게 2.5년이란 시간이 흐르고 다시 사이클이 한 바퀴 돌아 이상적인 삼각형이 아닌 매력적인 다각형이 되었다. 각각 길게는 아니지만 어쨌든 인턴을 합쳐 5개의 회사를 다녔다. 이제는 팀장이 되었고 팀원도 두 명이나 생겨 새로운 포지션의 방향을 고민해야 될 때다. 늘 그렇지만 업무보다 사람이 힘들다. 




타전공으로써 좋아하는 영역의 일을 선택하고 꾸준히 행해온 일에 감사함을 느낀다. 문학관, 문화기획사, 도시재생, 컨설팅회사, 이번에 입사한 예술촌까지. 다양해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보라색이다. 좀 붉은 보라색, 좀 푸른 보라색, 진한 보라색. 경험상 어차피 어디 회사든 힘드니까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해버리란 건 맞다. 다만 어디 회사든 똑같다는 말은 동의 못하겠다. 각자 장단은 있으나 매우 다르다. 




색만 정하면 수채화를 할지 색연필화를 할지 결정하면 된다. 각 사람들의 성향에 맞춰 스타일이 확연히 다르다. 그건 본인이 노력한다고 정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일례로 예전 동기는 할 말을 다 하고 산다고 생각했고, 나는 상사에게 굉장히 너그러이 잘해준다고 생각했지만 서로의 기준은 다르기 마련이다. 제삼자가 날 보며 회사에서 이런 말을 한다고?!?!라고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사실 볼 때마다 그랬다는 게 함정. 하지만 그 3자에게도 그건 네 생각이지. 난 잘하고 있어라고 대응한 게 투함 정이다.




어쨌든 한 바퀴 두 바퀴 하다 보면 내 스타일이 보이기 마련. 나는 일은 열심히 잘하는 대신 할 말은 다 하고, 작은 것도 타인을 설득해서 내 맘대로 하고 당당하게 시키는 경향이 있다. 대신 주말이든 뭐든 일이 급하면 신경 쓰여서 꼭 끝내야 하고 새로운 것을 많이 접하므로 아이디어와 추진력이 좋다. 호불호가 매우 확실하다. 어디든 패기 있고 열심히 하려는 비교적 낮은 페이의 젊은 층은 사랑받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런 대우가 당연하다. 여하튼 성향을 알았으면 그냥 그대로 하면 된다. 장점을 키우고 단점을 고친다? 아마 다이어트보다 성공률이 낮을 거다. 그리고 밸로 의미가 없다. 이유가 궁금하면 디퍼런트라는 책을 꼭 읽어보시길. 







기획이라는 일은 여러 사람의 시선이 들어가야 완성도 있다는 평을 받기 마련이고 꼭 반대 성향이랑 같이 작업하도록 배치받는다. 서로 일적으로 보완하는 관계가 되고 보통 사이도 좋다. 지금까지는 다 파트너가 꼼꼼한 성향이거나, 혹은 그렇게 보이는 또래 남자였다. 




내가 달고 사는 소리가 나는 일 때문에 싸나워진다고 하는데 사실 안 그렇다. 나는 원래 잘되면 내 탓을 하고 안되면 외부 탓을 한다. 왠지 그게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갈수록 눈치도 안 보게 되는데 잠깐의 침묵을 참으면 더 원하는 걸 할 수 있고 그게 더 좋으니까 그렇다. 하지만 밖에서 무안해질 때면 난 또 일탓을 한다. 기획은 근본적으로 남을 설득해야 하니 본인의 주관이 세져야 하고 블라블라. 이건 꽤 편한 효과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찮을걸 싫어하고, 모르는 분야의 그럴듯한 말을 들으면 그럴듯하게 느낀다.




 하지만 나는 보통 순딩이 들과 일한다. 그래서 더 하고 싶은 대로 하기도 한다. 역시 미친놈은 있고, 사실 그중 하나가 나일 가능성이 높긴 하다.. 아, 어디로 이직하던 1년을 채우라는 말이 만연한데 나도 1년 채운적이 없다. 그것보단 그냥 잘하거나, 잘하는 척하면 된다. 어차피 나랑 일하기 전에는 다들 내가 얼마큼 하는지 모른다. 가계약 중에 중요한 일을 시킬리는 없고, 막상 중요한 일이 맡겨졌을 때는 이미 계약서에 도장 콩한 상황이다. 




근데 잘하는 척 좀 하다 보면 진짜 잘하게 된다. 문화 분야는 영업처럼 잘한다의 척도가 없다. 깡이 곧 실력이 되고 다양한 분야를 할 수 있으면 그것 또한 실력이다. 디자인을 잘하는 척하면 pt제작 의뢰가 들어오고, 그 pt가 붙는다면 액수가 클수록 난 잘하는 애가 된 거다. 막상 내용에 내가 붙인 건 하나도 없다.





지역에는 늘 젊은이가 부족하지만 패기 넘치는 젊은이는 더 부족하니까. 이렇게 인맥 고용이 판치는 지역, 소문이 빠른 지역에서는 정말 조금만 더 잘하면 된다. 조금만 더 색다르고 트렌디하면 된다. 뭐든 불안정한 사람이 더 노력하기 마련이니까.




직업을 가지면 뭔가 더 안정될 것 같은데 사실 경제적으로만 그렇다. 나는 그냥 영역 넓히기를 좋아해서 안정이랑은 관련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안정이란 게 별로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도 않고. 





한 번도 부모님의 소개로 입사한 적이 없다. 사실 부모님이 좋은 곳 소개해주면 다녔을 테지만 우리 부모님은 늘 가혹할만치 틈을 안 주신다. 기다려주는 것의 효과는 항상 특출 나게 뛰어나다. 총 3개의 지역 모두 기존에 알고 있었던 사람이 전혀 없었지만 결국 나의 커뮤니티를 많이 만들어냈고, 일거리가 없어 밸밸댈때도 있었지만 전공 외직종을 홀로 뚜벅뚜벅 걸어가 결국 인정받고 일하고 있다. 




나는 이게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그리고 어딜 가서 든 어떤 상황이든 역시나 잘 해낼 것을 믿는다. 새로운 지역과 새로운 상황에 잘 스며드는 삶. 사실 스며든다기보다 주도하는 게 많지만 어쨌든 수많은 도전과 시간과 감정을 투자하는 일이다. 그간 모두 유난히 성공적이었다. 




자존이 아픈 사람이 많은 요즘, 오래간만에 만나 대화하고 내게 치유받았다는 사람들이 많다. 내 글들로 힘을 받는 사람도 많고. 난 같은 또래에 마음이 아픈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지도 정말 몰랐다. 겉으로는 다들 행복하고 야무져 보이는데... 난 한 게 없다. 물론 치유도 다들 스스로 한 일이고, 할 일이고. 다만 내가 우울했을 때 도움이 되었던 말은 알려줄 수 있다. 불교 교리에 어느 말이 있다. 모든 것은 적당한 때에 결국 네게 올 것이니 인내심을 가지라는. 난 이 말이 왠지 그렇게 위로가 된다.



생각 없이 그냥 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회사의 틀 밖에서 남을 신경 쓰고 어려워한 지가 오래됐다. 모두가 다 각자의 욕구를 발현시켜 다채로운 사회가 되면 좋겠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남들을 생각하는 옳은 선택이라 믿는다. 학생 때, 대학 때 보던 창으로는 삶의 가짓수가 너무 적었다. 직업도 몇 개 몰랐고, 삶이 이렇게나 다채롭고 크고 다양한 가능성이 있는지를 미리 알았더라면 더 재밌었을 텐데. 그리고 그만 졸았을 텐데.




암만 생각해도 내가 다 잘할 필요가 없다. 못하는 부분은 협업하면 된다. 근데 사람들은 협업하는 과정은 잘 모르고 다 잘하려고 해서 스트레스받는다. a는 노란색이고, b는 빨간색이고, c는 파란색인데 멀리서 얼핏 보고 다들 무지갠데 나만 한 색이라고 슬퍼한다. 내가 파란색이면 더 파래지면 된다. 친구 6명이면 무지개는 금방 만들어진다. 친구가 24명이면 내가 구성 가능한 무지개는 4개나 있다. 그럼 더 좋다.




공유경제와 사회적 가치가 하루가 멀다 하고 언급되지만 실제 공유와 사회적인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다. 직장인들은 외로워하다 마음이 아파진다. 스마트한 액정은 끝없이 소비를 부추기고 가십을 퍼트린다. 여행 갈 때만 잠시 살아있는 것 같고, 반복되다 보면 진짜 이럴 땐가, 왠지 질린다. 




인스타 피드도 다들 비슷비슷하다. 나는 개개인의 생각이 더 궁금하다. 각자 경험이 다른데 생각은 더 다르지 않을까? 속내음을 쓰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물어보면 많이들 오글거린다 할까 봐 못쓰겠다 한다. 아니 오글거리는 사람이 팔로우를 끊어야지. 쓰는 사람이 왜 대상화되는 거지? 세상이 요지경이다. 유난히 궁금한 사람들도 있다. 




글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할까. 오랜만의 호캉스와, 따뜻해진 날의 햇볕 아래의 사색은 오늘도 나를 기분 좋게 한다. 



박약이 주는 삶의 용기가 필요하다면?

https://brunch.co.kr/magazine/bakya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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