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약 May 10. 2024

제왕절개 이후 병원에서의 6일

뜨끈한 병원에서의 사생활

제왕절개 수술이 끝나고 바로 병원에 입원했다. 수술은 한 날은 거의 움직이지 못했다. 고통과 압박보다는 이질감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운동하고 쌩쌩하던 내가 이제는 병상에만 누워 소변줄을 차고 있다니. 병원 침대도 낯설고 병실도 낯설고 아이를 낳았다는 것도 낯설었다. 저녁에는 골아 떨어졌다가 새벽에 몇 번씩 깨기도 했다. 몸의 모든 감각들이 낯설고 불편했다.


다음날 일찍 눈을 떴다. 배가 너무 고팠다. 하루의 금식도 참지 못하다니, 오늘 미음을 준다고 했는데.. 하면서 오매불망 밥을 기다렸다. 원래 방귀가 나와야 밥을 주는게 원칙인데, 방귀는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배고프다면서 택이를 채근하기를 여러번, 그래도 아침 일찍 담당의사가 회진을 돌고, 상처를 소독하고 소변줄을 제거한 후에 미음이 나왔다. 미음이라길래 적은 양의 스프일줄 알았는데 한 뚝배기를 꽉 채운 쌀 형태가 있는 죽이였다. 허겁지겁 먹었다. 배가 채워지니 그제야 다른 생각들이 들었다. 


일단 빨리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도움으로 일어나보니 생각보다 걸을만 했다. 물론 아주 천천히 링거지지대를 잡고 걷는 걸음이였지만, 내내 누워있다보니 갑갑했다. 복도가 길진 않았지만 30분을 걸었다. 뭔가 소화도 잘 되는 기분이였다. 바깥 풍경도 좀 보고, 훨씬 시원한 트인 복도에서 한참을 걸었더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끼니마다 밥을 먹고 걷기로 작정했다. 처음에 병원에서 내내 할 일은 없었다. 몸은 아직 불편하고, 시간은 많고, 할게 없으니 남편과 다양한 대화를 했다. 


방은 찜질방 같았다. 아, 붓기를 이렇게 사람을 쪄서 빼는건가 싶었다. 신생아는 하루 두 번, 유리창 밖에서 볼 수 있었다. 너무 작아서 존재 자체가 신기하고 내 애같은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분이였다. 아이는 늘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가끔 조금 꼼지락대는 정도였다. 아쉽게도 코로나 이후 남편 외 면회는 안된다고 해서 양가 부모님들은 애가 탔다. 다른 아가들은 꽤 통통한 아가들도 많았는데, 우리 아이는 얼굴골격이 다 드러날 만치 살이 없어 누굴 닮았는지도 보이지 않고, 서양 갓난애기 같았다. 애초에 2.8키로로 태어나서 아주 작은 편이였다.


수술 직후 2-3일이 쉬기 제일 좋은 시간이였는데, 곧 유축 지옥이 올줄 몰랐다. 계획적인 사람들이야 유튜브로 이거저거 다 찾아봤겠지만 나는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편이다. 또 우연을 사랑하는 터라 뭘 미리 찾아보는 경우가 잘 없다. 그냥 만나는 문제들에 최선을 다하고 다 사랑하는 편이다. 아이를 낳고 모유가 돌기 전, 병실은 지루하디 지루했지만 시간은 차곡차곡 잘 갔다. 하루 세 끼를 먹고, 세 번을 걸어 움직였다. 간호사들은 운동 정말 열심히 한다며, 찐 살 다 빼고 가겠다고 덕담을 했다. 이건 찐 살이 아니라 원래 있던 살인데.. 사람들은 붓기로 알았다.


그렇게 이삼일이 호로록 지나가고 가슴이 찡-해지기 시작했다. 간호사에게 문의해서 가슴마사지도 예약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본 비릿한 통증이 양 가슴이 가해졌다. 친구들은 통곡마사지가 출산보다 아프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가슴마사지사는 미리 3시간마다 유축을 해놓으라고 했다. 맨 처음 유축은 습기였다. 새벽에도 깨서 유축을 하는건 쉽지 않았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열심히 모았다. 


통곡마사지를 받는데 세상 처음 느껴보는 아픔이였다. 생애 처음으로 가슴이 기능을 하는 시간이였다. 가슴을 자극하는 것도 너무 아프고, 자극하면서 반대쪽에도 느낌이 와서 아팠다. 가슴에서는 모유가 튀었다. 한시간이나 받아야 하는데.. 그나마 마사지사님이 수다를 열심히 떨어줘서 시간이 빨리 갔다. 내가 서구형 가슴이라 젖양도 괜찮을거고 고통도 덜 한 편이라는데, 동양형 가슴은 도대체 얼마나 아픈거지 싶어 혀를 내둘렀다. 일단 두번의 예약을 더 하고, 당장 내일도 와야 하는데.. 속으로는 울상이 지어졌다.  


신생아실에서 콜이 왔다. 아이에게 젖을 처음으로 물렸다. 나오는건 없었지만 자궁쪽이 싸르르하게 아팠다. 일단 아이를 안아봤다는거 자체가 의미있었다. 아이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분유는 꿀떡꿀떡 잘도 먹었다. 먹다 자고, 먹다 자고.. 간호사가 아이는 잘 먹고 잘 자는 편이라고 했다. 분유를 먹이는건 생각보다 시간도 꽤 오래 걸리고 자세도 불편했다. 옆에는 모유를 먹이는 산모들도 많았다. 아마 조리원 사람들인가 보다. 익숙하게 먹이는게 멋져보이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수유콜은 하루에도 몇 번씩 울렸다. 대충 3시간 텀이였던거 같다. 100일까지는 이렇게 먹여야 한다는데, 눈 앞에 아찔했다. 하루가 금방 갔다. 하루 세 끼를 먹고, 가끔 택이가 사오는 간식을 먹고, 세 번을 걷고, 세시간에 한번씩 유축과 수유를 하고, 가슴마사지를 받으로 갔다. 사실 밤에도 유축하느라 자꾸 깼기에 낮잠도 자야 했다. 또 난 그림도 그려야 했다.


곧 단체전 전시가 있는데 완성하지 못한 작품이 있었다. 조리원이 끝나고 집에가서 완성할 예정이였는데 생각보다 리플렛 사진을 일찍 내야 했다. 그래서 택이에게 그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다행이 큰 그림은 아니여서 휴대가 간편한 편이였다. 새벽에 유축이 끝나면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렸다. 하루 한두시간이라도 진도가 빨랐다. 이렇게 할 일이 많으니 시간이 아주 빨리 지나갔다. 차라히 다행이였다. 느리고 지루한 시간들이 길게 이어지는것보단 훨씬 나았다.


알게 모르게 성취감이 있었다. 임신 기간에는 아이가 보이지도 않고, 뭐가 진행되는지도 느끼지 않아서 답답한게 있었다. 아이를 낳고나니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빠르게 지나갔고, 해야할 일들이 아주 많았다. 나같이 부지런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이게 나았다. 바쁘고 피곤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숨통이 트였다. 어짜피 힘들거라면 빨리 돌파하는게 낫겠다 싶었다.


택이는 한 달간 육아휴직을 쓴다고 했다. 고민하다 조리원에서 퇴소하면 남편과 둘이서 아이를 보고, 한달 이후에 산후도우미를 요청해야겠다 싶었다. 다행히 택이는 아주 가정적인 편이고, 정부와 지자체에서 지원이 많았다. 누구나 출산 직후에는 아내에게 잘하겠지만, 택이는 정말 잘했다. 사실 그가 병원에서 할 일은 없었다. 첫 이삼일은 힘들었지만 그 이후에는 나도 몸을 어느정도 잘 쓸 수 있게 되었고, 그가 땀을 흘리며 더운 땅바닥에서 자는 것도 안쓰러웠다.


늘 잘해온 선택이라 생각하지만, 다정하고 가정적인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내가 이 사람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물론 사람이라는게 다 장단이 확실하기 때문에 다른 큰 단점들도 있지만.. 매번 그게 다 덮어지는 수준이다. 그래서 늘 주변 친구들에게 다른 가치보다도 다정하고 가정적인 사람과 결혼하기를 추천한다. 살수록 당연하게 느낄 줄 알았는데, 갈수록 더 고마워진다. 더 당연하지가 않다. 택이는 병원에서도 청소 이모님, 병원 간호사들, 산부인과 의사와 간호사에게까지 커피를 돌리며 감사함을 표현했다. 


갈수록 아이를 안는 것도 익숙해지고 유축양도 조금씩 늘었다. 아이는 조금씩 볼살이 올랐다. 수액을 빼고 나서는 붓기도 가라앉고, 붓기를 빨리 빼려 괄사도 열심히 했다. 반지가 들어가는걸보니 효과는 꽤 있는것 같았다. 병원에서 몸은 이미 다 나은 기분이였다. 컨디션도 수술 다음날부터는 꽤 좋았다. 천국이라는 조리원 생활이 궁금했는데... 금방 6일이 쉽사리 지나 조리원 입소날이 그렇게 다가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첫 아이의 탄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