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아닌 감사함으로 그리는 그림
월초에 신청했던 갤러리의 일정이 벌써 다음주로 다가왔다. 리플렛도 만들어야 하는데, 작품이 없다. 아기가 80일이 되면서 이제 통잠을 자기 시작했다. 아직은 어려서 낮에는 잠깐 잠깐만 잠들기때문에 낮에는 따로 시간을 뺄 수 없다. 보통 아기는 8시쯤 잠들기에 그때부터 2시간씩을 매일 그려보려 한다. 역시 삶은 알아서 내게 과제를 주고, 타이밍을 또 맞춰준다. 덕분에 오랜만에 기분좋은 쪼임을 느끼면서 설산을 그리고 있다.
요즘은 그림이 늘지 않아 걱정이다. 눈은 높아질대로 높아졌고, 내년에는 미협 신청도 하려고 하는데 내 실력이 내가 봐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른것보다 좀 더 자연스러워지면 좋겠다. 당장은 아뜰리에에 가서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볼 수도 없고, 뭘 배우고 있을 시간도 나지 않는다. 어쨌든 연습량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 육아를 하면서 일을 쉬는 내내 저녁에 그려볼까 생각중이다. 그러면 내년 봄쯤 개인전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습하고 더워 에어컨을 틀었더니 확실히 물감이 훨씬 빨리 마른다. 아, 몇가지 색이 없어 급하게 인터넷을 켜서 배송을 시킨다. 자료조사를 조금 더 해야할텐데.. 마침 오늘 미술대전 수상작 전시회에서 작품 반출을 했다. 남편과 아이와 함께 커피를 사들고가 인사를 했다. 다들 우리 아이를 너무나 예뻐해주셔서 감사하다. 다양한 작가님들과 그간 연락이 뜸했던 작가님들도 생각난다. 한 작가님의 작업실에 들리겠다고 약속하며 나왔다.
작년에는 정말 전시회가 많았다. 한 10개 한것 같다. 해마다 하는 단체전은 여성작가회 2회, 아뜰리에 1회로 총 3회정도다. 그런데 작년에는 이런 저런 전시들에 갑자기 많이 초대되었다. 미디어아트 전시도 있었고, 센터에서 초청한 전시도 있었다. 잠을 갈아 준비한 덕에 늘 새로운 그림을 선보일 수 있었다. 심지어 만든 옷까지 끌어와서 의류전시까지 같이 했다. 올해는 그럴일이 없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늘 미공개 작품을 몇개쯤 준비할 필요는 있다.
해마다 공모전은 2개를 낸다. 이건 사실 더 늘리면 좋겠지만, 큰 작품들이 들어가기에 준비 시간이 부담이 된다. 더 큰 공모전에 내기에는 100호를 그릴 공간도 없다. 일단은 1년에 최소 공모전 2개, 단체전 3개의 작품을 준비하면 된다. 나는 주로 산을 그리는데, 그림에 밀도가 꽤 있는 편이라 시간이 훨씬 더 걸린다. 물론 매일 저녁에 그림을 그린다면 더 많은 그림들이 완성되겠지. 맘에 들고 말고를 떠나서 일단은 다작해야 한다는걸 잘 안다.
그림을 그리면서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그 순간들이 좋다. 대부분의 생각은 긍정적으로 끝을 맺는다. 뭐라도 열심히 한다면, 하늘은 적재적소에 좋은 기회를 줄거라 믿는다. 지금 욕심내는건 개인전을 한 번 하고 싶고, 대학원을 다니고 싶고, 갤러리에 소속되고 싶고, 아트페어에도 나가고 싶고, 작업실을 운여하고 싶다. 일단 내가 그리는 것에 어느정도 전문성이 생긴다면 레지던시 작가, 웹드로잉과 입체작품 등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다. 일단은 더 실력을 쌓는게 먼저다.
8년전, 처음 공모전에 그림을 냈을때는 언제 9년을 채우냐며 막막해했다. 하지만 벌써 8년차가 됐다. 그간 실력도 많이 오르고, 아는 것도 많아지고, 좋은 관계들도 생겼다. 원래 막막한 것들도 방법을 모르는 것들도 천천히 하다보면 뭐야, 벌써? 하면서 또 되는거다. 그러니까 불안해하지말고 차분히 계속 해나가면 된다. 10년 해서 안되면 20년하고, 20년 해서 안되면 30년하지 뭐. 그림은 평생 할꺼라서 상을 못받아도, 대상을 받아도 상관없다. 물론 기분이야 다르겠지만, 남들이 뭐라하든 상관없이 영원히 할 내 친구다.
살면서 평생 하고 싶다는게 있다는게 어디인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려 한다. 단체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온게 감사하고, 물감과 붓과 캔버스를 살 수 있는 재력에 감사하고, 음악을 그리며 그릴 시간이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다. 그러지 못한 숱한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닥에서 시작하는건 오히려 좋아. 오늘도 손이 아닌 감사함으로 그림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