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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Aug 03. 2021

선물 같은시간

복잡한 세상에 그냥 서있다는 긴장감으로

누구나 심경이 복잡하다는 20대의 마지막 해. 무던히 사는 편이라 나이 때문에 심경이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너무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에 치이고 취미에 치이고 관계에 치였다. 일의 물리적 조건에 전혀 만족할 수 없었고 예민해졌다. 효율을 중시하는 나와 대책 없는 상사의 갈등은 기질 자체의 문제라 해결이 될 수 있는 범위가 아니었다. 그냥 조금 참을 수 있는 상황에 참아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발전 없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쉬자. 쉬기로 했다.


스스로에게 준 기간은 6개월. 정말 발 닦고 잠만 자려했는데. 부지런하고 계획적인 이 기질은 절대로 그렇게 두질 못했다. 정리되지 않은 일들을 마무리하느라 한 달이 지나갔고, 빅 이벤트들을 조율하느라 한 달이 지나갔다. 일을 쉰 지 2개월째, 이제야 백수 루틴을 찾아 일상을 살고 있다. 평소 배워보고 싶었거나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것들은 다 일단 발을 담가봤다. 코로나 덕에 약속도 많지 않고, 어디를 가고 싶다는 유혹도 없으니 스스로 짠 타임테이블을 아주 만족스럽게 지키고 있다.


출퇴근을 안 한지 단지 이 개월이 되었을 뿐인데, 나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아가고 있다. 가장 바뀐 점은 항상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짠 계획을 스스로 지키는 것을 아주 선호하는 사람이구나. 혼자 집중할 때에 가장 효율이 좋구나. 아침 카페에서는 다양한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르는구나. 스스로에게 완전히 집중할 수 있는 선물 같은 시간. 내년엔 출퇴근 없는 직업을 가져야겠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운이 좋게도 주변에서 나와 프로젝트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나름 많아 우연한 기회와 새로운 만남이 잦아지고 있다. 물론 그냥 네트워킹도 있다. 모든 일들은 직접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새로운 사람과 프로젝트는 언제나 호기심과 설렘을 준다. 디자인부터 온라인 홍보, 기획 운영, 강의 등 분야도 다양하다. 다들 언제 시작할지는 모르는 일들이지만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은 즐겁다. 최근에는 진작에 하기로 한 강의들을 조금 더 색다르게 보강하고 있다. 트렌디한 사람보다는 독보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데, 부디 내가 하는 일들도 일상도 생각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새벽에 운동을 다녀오면 오전에는 카페에 앉아 점심까지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중국어 단어도 조금 외우고 검색도 하고 논다. 어떻게 매일 놀아도 매일 재밌는지 모르겠다. 계획적인 성격이 치고 올라와 벌써 내년엔 뭘 하고 먹고살아야 하나가 제일 주된 관심사다. 좀 더 쉬고 한두 달 전에나 생각하면 좋겠는데... 나는 오늘도 기질에 진다. 직업을 쉬면서 아주 달라진 점은, 주변에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확 줄었다는 것이다. 홀로 있는 이 차분함이 너무나 좋다. 의외다 정말.


원체 과거나 미래에 크게 신경 쓰고 살지는 않아서 돌아볼 거나 뭐 엄청나게 새로울 것은 별로 없다. 이왕이면 직종을 좀 바꿔보고 싶어서 검사도 해보고 다양한 수업들도 들어보고 있다. 스스로에게 조금 더 집중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는 시간이 나와 늘 함께하면 좋겠지만 워낙 스케일 큰 목표들과 뭔가에 매진해서 해내고 싶다는 열정이 꿈틀대고 있는 걸 보니 이러한 평안한 기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철새들이 이동하면서 잠깐 쉬어간다는 조그만 바위섬들처럼, 비상하기 위해 꼭 필요한 휴식이 되기를 바라본다.


이런 선물 같은 시간에 감사하며 하루하루의 모든 것을 생생히 느끼며 있으려 한다. 뭘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도통 모르겠는 복잡한 세상에서 그냥 단지 꼿꼿이 서있다는 긴장감이 오히려 날 살아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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