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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Aug 11. 2021

10년을 돌아서 원점에 섰다.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

우리 집은 교육에 많이 투자했다. 나는 논술부터 바이올린, 수영과 미술에 태권도까지.. 당시 어린이들이 배우는 것 중에 안 배워본 것이 없었다. 기질은 달고 나오는지, 나는 그중에 미술이 그렇게 좋았다. 초등학교 방과 후 미술반에 처음 갔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낮은 테이블에는 그림이 그려진 카드가 가득 모여 있었다. 긴 웨이브 머리를 가진 화려한 해바라기 원피스를 입고 있던 선생님께서는 그중 새장이 그려진 그림을 주며 따라 그리라고 했다.


그때가 몇 살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것이다. 먼저 미술반을 다니던 친구들도 많았고, 이미 새장을 그리고 있던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크레파스를 꺼내 아주 열심히 새장을 따라 그렸고 미술반 아이들은 놀려댔다. "그게 무슨 새장이야?", "왜 이렇게 못 그려?" 어른들에게도 할 말 다 하던 아이였던 내가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모멸의 순간이 분명히 기억난다. 별로 속상하진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재밌었다.  미술반은 여러 학년이 섞여있었는데,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6학년 언니 2명이 있었다. 나는 커서 꼭 그렇게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고 미술학원도 따로 다니면서 내 꿈은 화가로 굳어졌다. 중학교부터는 꽤나 잘 그리기 시작해서 대학에 가서 그림대회도 나가도 상도 여럿 탔다. 그 이후로 모멸의 순간은 없었다. 서양화과를 가고 싶었고 성적도 순탄했다. 집에서는 조금만 더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갈 텐데, 얘가 왜 이러나 싶어 말리기 시작했다. 주말에도 학원에 가서 8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연예인 그림을 그리면 언니들이 몰래 사진을 찍어가곤 했다. 붓을 오래 잡아 오른손 중지 손가락은 아직도 휘어있다. 번잡한 모든 걸 잊고 한 사물을 관찰하며 집중하는 그 순간이 좋았다.


공부는 재밌었지만 답답한 학교는 체질상 맞지 않았다. 수업시간에도 매일 교과서 밑에 책을 숨겨두고 읽었다. 처음에는 학교 친구들이랑 금방 친해지는데, 이후에 관계 지속을 힘들어했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너무 지루해서 힘들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것을 잘 못한다. 대신 도전적인 일, 그리고 혼자 조용히 집중하는 일을 아주 잘한다. 미술은 그런 답답한 생활의 탈출구였다. 새벽부터 등교하며 매일매일 저녁을 기다렸다.


청소년 6년간 당연히 미대 준비생이었다. 누가 내 이름을 꺼내면 아, 그 미술 하는 애~ 로 통했다. 오전에 시작하는 미술 대회를 나가면 새벽부터 네 시간이 넘게 기차를 타고 올라갔다. 혹은 전날 도착해서 불편한 찜질방에서 자고 이동했다. 예체능 생이 지방에 산다는 것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절대 지방에서 그림 그리지 않을 거야.'라고 매일매일 생각했다. 상위권 대학에 몇 명을 보냈는지가 중요했던 사립 고등학교는 이화여대 1차를 붙었더니 플래카드도 걸어줬다. 거기까지였다. 나는 모든 미술대학에서 탈락했다.


집안에서 반대하는 일을 준비하다 온전히 능력으로 탈락한다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너무 어렸고, 내게 1년은 너무 길었다. 세상에 모든 자신이 없어졌다. 딴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일 년을 더 준비할 자신이 없었다. 주변에는 대학에 가지 못하는 친구들은 모두 재수를 했다. 나는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추가모집으로 뽑는 대학에 지원해 지방 사범대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 모든 친척들은 선생님이 여자 직업 중에 제일 좋다며 신이 났다. 자유롭던 미술학원 분위기에 익숙했던 내가 사범대학에 적응 할리는 만무했다. 그래도 어떻게 휴학 없이 졸업했다.


날카롭던 내가 깎이고 깎여 조금 둥그레졌을 때 졸업을 했고 우연히 문화기획 쪽 일에 몸담게 되었다. 일을 배우느라 정신없던 시간이 지나고 조금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생기니 다시 미술이 하고 싶어 졌다. 여기저기 수업을 들으면서 입시미술이 아닌 그림들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같은 수강생들 중에서는 10년 넘게 꾸준히 그림을 그리신 분들도 많다. 수강생들끼리 웃으며 농담을 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리운 고등학교 시절이 많이 생각난다. 그땐 힘들었었는데, 돌아서 보니 즐거웠고 마치 어제 같은데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렀다.


29살의 나는 다시 작가를 꿈꾸며 붓을 든다. 19살 때에 비하면 딱 10년을 돌아왔다. 그 십 년간 원하는 것을 스스로 포기했고 실컷 마음 아파했고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웠다. 앞으로는 원하는 것 앞에서 절대 뒷걸음치지 않아야겠다는 것을 배운 것만으로도 진하게 인생 공부했다고 치기로 했다. 나는 돌고 돌아 다시 시작점에 섰다. 사랑하는 것은 절대로 마음속에서 식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본가보다 더 지방에서 시작하려 한다. 언제나 날 그늘지게 했던 '아 제가 전공한 건 아닌데...'라는 어쭙잖은 변명은 이제 집어치우고 좋아하는 그림에 실컷 몰입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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