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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약 Aug 19. 2021

전체를 보는 눈

캔버스에 용기 쌓기

아침 10시부터 저녁 9시까지 3개의 레슨이 있는 목요일. 일주일 중 가장 바쁜 요일이자, 유일하게 오전에 일정이 있는 날이다. 목요일 오전에 있는 미술 레슨은 유명한 선생님이라 수업에 들어가기도 힘들었지만 다음 달부터는 건강상의 이유로 수업을 쉰다고 해서 벌써 걱정이다. 열 명의 수강생 중 나는 유일하게 수채화를 그린다. 올해 말에 친구들과 조그만 전시를 하기로 해서 그려야 할 것들이 태산이다.




일주일에 단 두 시간의 미술 수업. 수강생분들도 대부분 꽤나 오래 그렸던 분들이다. 캔버스 크기는 각양각색이지만 지금 내가 그리는 그림은 30호이다. 사이즈는 대충 큰 티비만하다고나 할까, 그리자면 그래도 나 큰 크기다. 모든 레슨에서 예복습을 잘해가는 편이지만 유난히 진도가 눈에 잘 보이는 수업이라, 꼭 덧붙여서 그려가고는 한다. 한 번의 터치도 모조리 기록이 남는 수채화는 늘 어려우면서도 또 매력적이다.




저번에는 가까이 보이는 건물을 그려 밀도감 있게 터치를 쌓아 올렸는데, 이번에는 안개가 자욱한 섬을 그리고 있다. 평소 사진이 취미인 아빠의 사진 작품 중에 골라 보고 그리는 터라, 사진상으로는 예쁘지만 그림으로 살리기 어려운 사진들도 있다. 매 그림은 대상도 구도도 다른만큼 또 다른 방식으로 들어가야 한다. 터치를 올리는 매 번을 진하진 않은지, 전체 풍경에 조화로운 정도로 들어가는 건지, 여기서 색을 다양하게 쓰는 게 맞는 건지... 나는 한 번의 터치에도 수십 번의 고민을 한다.




2시간을 10명이서 밀도 있게 쓰기 위해 작가님은 여러 그림을 돈다. 주로 아크릴화를 많이 하시고 유화와 수채화는 한 명 씩만 있다. 주변에 수채화를 잘 그리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참고라도 하겠는데, 아쉽다. 그래도 난 시간이 아까워 작가님이 아크릴화와 유화를 봐주시는 것을 다 따라다니면서 본다. 나중에 집에서 조그만 캔버스에 아크릴화를 그려봐야지, 늘 다짐하지만 실은 하는 수채화도 많이 손보지 못하고 갈 때가 많다.




작가님은 속도가 느리면 화가가 먹고살기 힘들다며 일필휘지로 그림을 뚝딱뚝딱 그리신다. 그림이 클수록 가까이서 보면 대비가 강해도 멀리서 보면 딱히 그렇지 않다. 가까이서 보는 시각과 멀리서 전체적으로 보는 것은 정말 다르다. 숲을 생각하면서 나무를 그리는 일, 이 전체를 보는 눈은 경험에서 나올까? 생각보다 더 과감하게 들어가야 하는 걸 알면서도 대부분 쉽게 과감해지지 못하고 망설인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가끔 내 그림을 봐주실 때, 이걸 이렇게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감한 터치들로 시작하는 때가 많다.




물론 결과를 보면 이렇게 해도 충분히 되고, 너무나 예쁜 그림들이 나온다. 하지만 내가 과감하게 해도 마지막엔 정리가 되지 않는다. 단지 과감해서 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과감하게 들어가는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절대 한 번에 용기 있게 들어갈 수가 없다. 어떤 그림은 조금씩 어둡게 쌓아가도 되지만, 어떤 그림은 한 번에 확 들어가는 터치가 필요하다. 오늘도 내 초벌은 조잡하고 어설프지만 나는 흐린 눈을 하고 마치 나쁘지 않다는 듯 계속해서 노력한다.




전체적인 조망을 보는 일은, 적어도 한 번은 완성을 해야 생긴다. 전체를 온전히 만들어 봐야지만 전체를 알 수 있다. 나는 아직 거기까지 실력이 되지 않아서, 나무를 더듬거리며 숲을 유추한다. 이렇게 여러 번 유추하다 보면 그래도 대강은 짐작이 가겠지. 세상일은 어떻게 이렇게 모든 게 용기가 필요한지, 물감 섞는 것에, 물 양을 조절하는 것에, 터치를 한 번 올리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좀 더 과감하게 들어가는 도전적인 마음과 여기에 시간을 얼마나 썼는데, 일단 망하지 말자고 안정을 추구하는 마음이 싸운다.




그래도 도전적인 마음이 이겨야지만 언젠가 숲을 알 수 있겠지. 나는 오늘도 캔버스에 용기를 쌓았다. 억 소리 나는 작가님의 실력을 부러워하며, 와 소리 나는 다른 수강생들의 그림을 뒤로하고 고민 고민해서 내 그림을 천천히 쌓아갔다. 그림과 삶은 참 비슷하다 생각하면서, 역시 해도 해도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고민하고 용기 내어 색을 쌓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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