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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도빈 Sep 11. 2023

죽마고우 보거라

가족같은 친구에게


죽마고우 보거라


그래 알아, 정팔이랑 도출이도 그러더라. 사는 게 뭔가, 이렇게 다 지나가 버리는 건가, 상실과 허무가 밀려든 다더라. 차라리 빠르게 지나가기를, 꿈꿀 수 없을 정도로 낡아져 버리기를 바라기도 한다고. 너도 나도 세상도 모두 힘든 시절 아니겠니. 그런데 친구야, 그럴수록 당당히 맞서야지, 우리가 지금 그럴 때냐. 한가롭게 자아실현, 뭐 그런 거나 챙기고 있을 때냐 말이다.


우리 졸업하고 백수로 방구석 벽지 패턴만 연구 하던 때 있었지. 우리가 학점이 좋냐(학사경고), 영어를 하냐, 기술이 있냐. 그렇다고 인물이 좋냐. 불러주는 이도 갈 곳도 없던 그 시절 말이야.

그 때 너 사진 한다고, 예술 한다고 고백 했잖아. 그럴 때가 아니었지만 너는 그랬잖아. 대포 같은 카메라 둘러메고 바다로 산으로 사방팔방 돌아 다녔지.

그래서 지금 사진은 찍고? 먹고 살기 바쁘다고? 눈도 침침해? 카메라는? 장롱 세 번째 서랍에? 아, 어디 있는지도 몰라?

이제 사 말이지만 그쯤하길 얼마나 다행이냐. 예술? 예술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느냐는 말이다.


네가 카톡으로 보내 준 소설들 잘 읽었어. 너는 말했지. ‘소설이 짧아 미안하다. 하지만 나는 단거리 선수야, 장거리는 내 스타일이 아니거든'

친구야, 미안해 마라. 아니 더 짧아도 돼. 정팔이랑 도출이도 그러더라. 무슨 말이 이렇게 많냐고, 요약 좀 안되겠느냐고.

그러니 너는 너대로 괜찮아. 칼루이스가 황영조가 될 필요는 없잖아. 뭐 그냥 달리지 않아도 괜찮고.


그래도 말나온 김에 친구로서 불문곡직하고 하자면, 네 소설은 정말이지... 재미가 없어 재미가. 나는 재미만 없었는데 정팔이는 교훈도 감동도 울림도 또 뭐, 여운도 없다고. 그저 한낱 문자의 나열일 뿐이라나.

또 도출이는 뭐라더라. 핍진성이 없다고. 소설은 아무나 쓰냐고. 지가 마르케스 냐고, 하루키 냐고, 김연수 냐고. 문학한다는 놈이 자기 ‘주제’를 모른다고 흥분하더라. 전문가도 아니면서 말이야.

사실 아내에게도 보여줬거든. 뭐라더라, 벤자민 프랭클린이 그랬다나, 시간은 금이라고. 지금 내 소중한 금을 낭비한 거라고. 알다시피 내 아내 총기聰記 있는 여자잖아.


친구야. 자고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라 하지 않더냐. 우리가 평천하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수신은 해야지 않겠냐. 그러니까 생각이란 걸 좀 하자, 생각!


고마워 할 것 없다. 소주나 한 잔 사, 우린 그거면 됐다. 아무쪼록 용기 있는 결단, 총기 어린 결심 기대할게.


추신 :

아 참, 정팔이가 그러더라. 네 사진,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모르겠다고. 도출이는 뭐라더라, 사진은 순간의 예술인데 네 사진은 참을성이 없다고. 아마 네 천성이 게을러 어쩔 수 없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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