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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NZ한의사 Sep 02. 2024

걱정이 글이되고 기쁨이 될 줄이야...

돈은 되고 걱정은 안 되는 NZ 부. 자의 <돈. 걱정 환전소>

돈은 되고 걱정은 안 되는 NZ 부. 자의 <돈. 걱정 환전소


아들에게 이 원고를 미리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나의 글은 다른 길로 향했을 것이다.

누구나 나이는 드는데 아빠만 유독 몸살 앓듯 나이 듦을 늙어감을 걱정하시는 것 같다는 

뼈 아픈(?) 말에 나는 '아차'싶었다.

'그래... 내 넋두리야 코인노래방에서 한두 시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 그만이지...'

'누가 읽을 거라고... 책에다가 넋두리 쏟아낼 생각을 했을까...'

아들의 조언 덕분에, 책을 내려는 이유와 목적을 냉정하게 되짚어 수 있었다.


아래 글의 키워드는 '일. 이사. 이민. 방랑. 여행...'이었다.



가제목 <가끔 이사하고 매일 방랑합니다>

        _ 환갑잔치 대신 쓰려고 했던 '지구촌 방랑기'



(프롤로그)


오래 쉴 곳을 찾아 떠나는 먼 이사


    인천국제공항 가는 길, 비행기를 오래 탈 수 있다는 흥미로움 보다 가방의 무게가 부담스럽다. 양손, 어깨에 짊어진 가방에 설렘임이 억지로 끌려온다.  하지만 가장인 내가 그런 티를 낸다면 아내와 두 아이들은 공항 가는 길을 포기하고 돌아가자고 할지도 모른다. 항공사 허용 한도까지 꾹꾹 눌러 담은 이민 가방은 터질 듯했고 열 살 꼬맹이 둘째 아이에게는 집채만 한 바위 같았다.  

‘드론’으로 촬영했더라면 아마도 자신들의 몸뚱이만 한 짐을 끌고 나란히 힘겹게 걷는 개미가족 같았으리라.

 

이민을 빼고도 우리의 이사는 열다섯 번. 그때마다 한바탕 씩 다른 색깔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른 느낌이다. 그 느낌을 글로 쓰고 싶었다. 글의 형식은 내 머릿속 꼬리 무는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는 방식으로.


우리 가족은 왜 그렇게 이사를 많이 했을까…?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니었는데.. 

15년 동안 열다섯 번의 이사도 모자라서 지구 반대 편 멀고도 먼 나라로 이사를 감행하다니... 예전에는 이런 경우 '역마살'이 잔뜩 끼었다고 말들 했는데.


생각해 보면 가장인 내 고집 때문에….


한 여자의 남편,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이후에도 나는 오래된 꿈을 버리지 않았다. 

초보 가장이 초보 기장이 되어 이민을 감행했던 것은 내 무모한 고집 때문이었다. 그런 나의 ‘고집’은 언제 어떻게 생긴 걸까?


적지 않은 이사와 이민으로 세월은 흘렀고  어느새, 30년 경력의 가장이다. 이제 나는 아내와 아이들의 베테랑 기장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은퇴할 나이인데… 나는 어쩌다가, 


-        환갑잔치 대신 ‘지구촌 방랑기’를 쓸 결심을 했을까…

-        아내는 어쩌다 그렇게 고집스러운 남자를 만나, 꿈에도 가 본 적 없는 먼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

-        아이들은 어쩌다가 그런 부모를 만나 이민 1.5세대가 되었을까…

-        인생 여행길에서 ‘우리는 모두 방랑자 아닐까. 단지 그 여정의 여운이 서로 다를 뿐…’

-       같은 시대에 함께 여행길에 오른 것만으로도 ‘인연’이리라... 거기에 어쩌다 서로 ‘옷 깃이라도 스친다면’ 보통 인연이 아닌 거다…

-        친구, 부부, 가족, 많은 지인들과 어떤 마음으로 지내야 할까…

         아버님을 떠나보내며 느꼈던 그 마음...


‘그래… 누구라도... 있을 때 잘해야겠다…’


NZ한인한의 원장님들과 즐거운 트레킹 마무리... (오클랜드 서쪽 해안선 따라...)


뉴질랜드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내 인생의 커다란 행운이다.


나에게. 이런 삶을 살게 도와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        Sharing is Caring/ 나누는 삶의 기쁨

-        배워서 남주는 보람

-        다양성, 나와 다름을 보듬고 인정하는 삶의 태도…

-        다양한 민족, 인종, 종교, 가치관, 가족관… 

나는 이 모든 것이 뉴질랜드의 문화적 보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행운이 있기까지 한국에서 나는 '걱정왕'에 '일중독자'였다. 

내 걱정의 8할은 '돈 걱정'이었고 이십 대 이전부터 '경제적 독립 운동가'가 되었다.

마흔을 훌쩍 넘기며 '독립 만세'를 외치고 '망명 같은 이민'길에 올랐고 다행히도 망명은 성공적이다.


_나의 이런 경험들을, 돈 걱정에 하는 수 없이 일에 빠져 살아야 하는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_젊을 적 내 나이를 살아가는 두 아이들과도 어색하고 어설픈 아재 잔소리 대신 내 마음의 장(긴)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 <돈. 걱정 환전소>는 그렇게 생겼다. 나는 지금, 부자아빠이고 아들은 가난하다.)


가끔씩 돈 걱정하고 매일 감사하며 오늘을 가볍게 살고 싶다.

돈과 걱정이 없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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