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말로 상처받은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는 걸까?
일터에서 주고받는 말들은 때론 벌처럼 상대방을 쏘아붙이기도 하고, 때론 나비처럼 우아하게 상대방을 향해 날아다닌다. 벌에 쏘인 것처럼 따끔하기만 했던 말을 들은 날도, 나비의 날갯짓처럼 세련된 상대방의 화술에 내가 할 말을 잊었던 날도 많다. 아마 사람들은 이런 걸 통칭해서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라고 부를 것이다.
일터의 말들 일부는 어느덧 내 마음에도 새겨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기억들은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망각을 허용하는 우리의 기억력은 그리 좋지 않았던 과거조차도 ‘그땐 좋았지’라는 말로 퉁쳐서 추억으로 만들기에 편리한 이유가 된다. 그렇지만, 나를 상처 입힌 말을 들었던 날의 기억은 잊혀지기에는 내 마음 한 켠에 단단하게도 자리를 잡았나보다.
그러고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그날의 기억이 소환된다.
지난 겨울에 집을 향해 걸어오는 길에 서늘한 공기를 느꼈다. 그 순간 내가 광고대행사의 직원으로서 일하던 십여년 전에 참석했던 한 회의장이 떠올랐다. 그날 아침에 회의장을 향해 걸으며, 내가 느꼈던 공기의 촉감과 비슷했다. 아직도 온 몸으로 기억하는 차가운 공기의 개운한 감촉말이다.
그날은 나의 평상시 출근시간보다 한 시간 반이나 이른 오전 8시에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다.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업무를 담당하게 될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인사를 나누는 킥오프 미팅이었다.
대회의실의 공기는 불편했고, 참석자들은 다소 경직되어 보였다.
‘앞으로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에 이런 회의를 몇 번이나 더 참석해야 하나?’
속으로 한숨이 나왔다.
가장 상석에 앉아있던 상대측의 본부장이 농담처럼 말을 던졌다.
“거 이사님, 지난번에 일할 때 같이 다니던 그 이사님 가방모찌하던 사람이 있었던 거 같은데, 맞죠?”
가방모찌란, 누군가의 곁에서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시중을 드는 사람을 뜻하는 일본 말이다.
예전에도 그 프로젝트는 나와 이사가 담당했었다.
‘혹시 그 사람이 칭한 가방모찌는 나인가?’
저 사람이 어떤 의미로 그런 단어를 선택했던 것인지 도저히 가늠이 안 되었다. 나의 노력과 역할을 순식간에 하찮은 것으로 평가절하하는 느낌이었다.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단언컨대, 나는 그 이상의 역할을 했어.’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와중에 나 스스로 입을 열어서 그게 나라고 이야기해야 했을까? 본부장이 정말로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어서 그런 질문을 한 건지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나는 내 옆에 앉은 이사가 사실은 당시에 함께 일했던 사람이 바로 나이고, 이런저런 일을 담당했던 실무자로 나 역시 프로젝트를 위해 성실하게 노력한 사람이었다고 적절히 대처해 주길 바랐다. 사실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선 가방모찌라고 칭한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았던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을 것이다. 모두의 묵묵부답 속에 본부장의 의문에 대한 답은 오리무중이 되었다.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대표로 나서서 본인의 조직을 위해서 일해준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지도 않고, 가볍게 멸시하는 표현으로 말하네. 정말로 누가 얼마나 중요한 일들을 정확하게 처리했는지 저 사람은 알지도 못할뿐더러 별로 중요하지 않은가 보구나. 그저 관계와 직급에 따라서 사람을 구분하는 것 같은데, 그건 정당하지도 않고 편협하기만 하다. 다른 직원들도 비슷한 의견일까?’
왜 아무도 답을 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그 회사의 조직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한 무례함의 타깃이 조직 안팎을 가렸을 리 없다.
나는 지금도 그 회의의 경직된 분위기와 가방모찌라는 단어로 우스꽝스럽게 상대방을 폄훼하던 뉘앙스, 주체할 수 없이 떨리던 나의 마음을 잊지 못한다. 그 회사는 미디어 산업에 속해 있으니 더욱 바른 우리말을 써야 할 곳이다. 그런 사회적 책임이 있는 조직의 리더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가방모찌라는 일본 말을 쓰는 저렴함까지도 기억에서 좀처럼 떨쳐지지 않았다.
아무리 강심장을 가졌더라도 일터에서 단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을 수는 없다.
근로자들은 일터에서 자원이자 상품이다. 기업은 태생적으로 생산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기업의 관리자들은 직원을 관리해야만 하는 인적자원(Human Resource)으로 본다. 한 직원이 제공하는 노동의 가치는 시간 대비 가격, 즉 효용성의 가치로 환산된다. 즉, 우리 모두는 나 자신을 상품화해야 하는 비인간적인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꾸준하게 증명해야 하는 현실을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일터에서 우리는 단지 임금에 의해서만 움직이지 않는다.
함께 일하는 기쁨, 나 자신에 대한 인정, 성공에 대한 갈망 등과 같은 감정적인 보상에 대한 기대 역시 노동의 대가에 포함되어 있다. 일터에서 ‘보상’이란 개념은 임금뿐만 아니라, 매우 사적이고, 복잡 미묘한 측면, 즉 무형의 가치도 포함한다. 우리가 상처받는 이유는 때때로 우리가 제공한 노동의 가치 대비 터무니없이 적은 보상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일터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나쁜 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존재감을 부정하려는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당연하게도 그런 말들은 상대방을 향한 공감이나 인정과는 거리가 멀다. 인정하지 않음으로 해서 상대방에게 불안함과 같은 감정적 동요를 심어 놓는다. 그런 식으로 그 사람이 제공하는 노동의 가치를 낮추고,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말속에는 ‘공개된 자리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좀 더 분발하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사악한 의도가 숨겨져 있다.
사악한 리더십이 과연 팀워크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줄까?
아니다.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가장 필요한 팀워크 형성에 방해만 될 뿐이다. 제대로 된 일터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마치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가 보이지 않게 순식간에 공기 중에 퍼지는 것처럼 조직에 해롭다.
특히, 리더라면 더욱더 그런 편견 가득한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 ‘그런 식으로’ 상처받은 동료들의 마음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다. 나는 함께 일하는 동료를 폄훼하는 조직에는 결코 보답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으론 내가 속한 조직의 경쟁력을 높일 수 없다.
결국 사람들을 회사 밖으로 눈 돌리게 하는 건 바로 옆에 있는 동료이다.
편견이 가득하고, 독성을 품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건 정말로 고역이다. 동료와는 가족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한다. 혈연에 의한 가족은 선택할 수 없었지만, 직장과 동료는 선택할 수 있다.
딱 한 사람. 그 사람만 없어도 내 직장 생활이 훨씬 나아질 것 같은 사람이 있는가? 그런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직장이라면, 그저 그런 사람 때문에 회사를 옮기는 것은 억울하다.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 내 마음이 너무 많이 다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런 사람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
‘가방모찌’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나는 어려서 나 스스로를 지켜내는 마음의 힘이 지금보다 많이 연약했다. 물론 지금도 그런 말들을 들으면 마음이 아플 게 당연하다. 하지만, 이제는 상대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문제 상황에 대해서는 되도록 가볍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한 가지 팁을 전한다면, 그저 그들을 내가 올린 소셜 미디어의 게시글에 악성 댓글을 남긴 상습 악플러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더 편해질 것이다. 그래도 ‘악플이 무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가? 하루 종일 신경 쓰이는 악플은 없는 게 낫다.
그리고, 기억하자.
대부분의 악플러들은 자신들의 인생이 힘들어서 그런 댓글을 남기는 철부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린 이미 이런 경우를 여러 번 목격했다.
그런 말을 한 사람 역시 과거에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조직원을 불안하게 하는 것으로 리더십을 강화하고 싶은 잘못된 조직문화일 뿐이다. 가볍게 생각하고 되도록 빠르게 잊어버리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