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이제, 진짜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by Balbi

02 이제, 진짜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말은 분명 따뜻했지만, 마음 어딘가에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위로였을까, 아니면 교묘한 위선이었을까.

물론 그녀들의 말에 전적으로 의지하지도, 철석같이 믿지도 않았다. 세상 물정을 모를 만큼 어리숙하지도 않았고, 사회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들이 '진심'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말을 듣고 나니, 불현듯 과거가 떠올랐다.

유치원 시절, ‘남자아이들은 다 그래’라며 감싸주던 엄마들. 하지만 돌아서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던 이들이었다.


그래서 더는, 아이를 중심으로 관계를 맺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 결심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졌다.

입학 초, 마음이 가장 흔들리던 시기에 영호엄마와 호태엄마가 살랑이는 봄바람처럼 다가왔다. 따스한 바람결 같은 그녀들의 친절은, 의심과 경계로 다문 준영엄마의 마음을 어느새 무장 해제 시켰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어쩌면, 그녀가 원한 건 진심이라기보다, 단 한 마디 따뜻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띠동갑인 영호엄마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스며들었다. 그녀 특유의 푸근함은 마치 ‘너에게 평안을 주노라.’고 말하는 교회 집사의 미소처럼 느껴졌다. 호태엄마는 "아들 셋 키운 선배맘으로서 조언해 줄게!"라며 아들을 셋이나 키우고 세 살 위의 첫째를 키운 경험 있는 선배맘이라는 것을 내세워 준영엄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아이들 입학과 동시에 급격히 친해지며 1학기를 보냈다. 몇 달을 함께 지내며 준영엄마는 영호엄마와 호태엄마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게 되었다. 준영이와 비교해서 형아 같은 영호와 호태가 늘 부러웠다. 12월생인 준영이는 입학하고 1학기를 보냈지만 아직도 유치원생 티를 벗지 못했다. 그런 준영이에 비하면 영호와 호태는 정말 어른스러웠다. 초등 저학년 때는 아이들 태어난 달을 무시 못한다더니 1월생인 영호와 호태는 정말 형님 같았다.


놀이수학 학원에서 들었던 할머니의 말이 집안일을 하면서도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난 여름, 잡힐 듯 잡히지 않던 하루살이 한 마리가 창가를 맴돌던 장면처럼, 그 말은 그녀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들과 마주할 때마다, 그 말은 각인되듯 더욱 선명해졌다. 그 후 그녀들과의 브런치 모임에서 준영엄마의 말수는 이전과 다르게 줄어들었다. 나누는 대화가 더 이상 예전처럼 편할 리 없었다. 그동안 그녀들에게 내뱉었던 푸념들이, 알고 보니 뒷담화의 소재였구나 싶어 속상했지만, 이미 지나간 말은 다시 담을 수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 눌러 담긴 불편함은 말 대신 침묵으로 변해갔다.


할머니의 충고가 있은지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준영이와 함께 놀이수학 학원에 갔다가 뜻밖의 인연을 만났다. 준영이가 두 돌 무렵 문화센터에서 친하게 지냈던 가온이 엄마였다. 가온이가 아파 문화센터를 그만두면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는데, 이렇게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어머,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가온이는 잘 지내죠?”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영호엄마와 호태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가며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가온엄마, 영호엄마랑 호태엄마는 어떻게 알아요? 전 입학하면서 친해졌거든요.”

“아, 전 유치원을 같이 보냈어요.”

“그렇구나. 영호랑 호태는 정말 어른스러워요. 듬직하고 점잖아서 준영이에 비하면 완전 형님이에요.”

“어, 형님 맞는데, 모르셨어요?”

“네? 뭘요? 영호랑 호태가 1월생이라 생일 빠른 애들은 확실히 다르구나 했는데…”

“에이, 그거 모르셨구나. 영호랑 호태, 사실 12월생이에요. 둘 다 12월 말에 태어났는데, 한 살 억울하게 나이 먹는 게 싫어서 출생신고를 1월로 했대요.

유치원 때 엄마들은 다 아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준영엄마는 속았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그녀들의 위로와 눈빛, 말투와 표정까지 모두 연기였던 걸까?’


늦된 게 걱정되어 편법을 썼으면서도, 정작 준영이의 늦된 행동을 보고 동정하는 눈빛을 보냈던 그녀들.

‘네 아들보다 우리 아들이 낫지.’

그들 속내는 처음부터 그랬던 걸까.


영호엄마는 어려서부터 키가 크고 늘씬한 체격 덕분에 일찍부터 모델 활동을 했다. 의도치 않아도 어디서든 눈에 띄고 주목을 받았지만, 교실 안에서는 조용한 배경에 가까웠다. 사람들의 관심은 받았지만, 그 관심은 그녀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영호엄마는 자신의 아들만큼은 어디서든 주목받고 인정받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런 욕망이 결국 아이의 출생신고를 늦추는 편법으로까지 이어진 것일까.


준영엄마는 출생신고를 일부러 늦춰 자기 아이가 유리한 위치에 서도록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고, 정작 그런 꼼수를 생각조차 못 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괜히 자신만 탓하며, 화인지 배신감인지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에 젖어들었다.


안다고 믿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몰랐다는 생각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그제야 그녀들의 민낯을 본 것만 같았다. 준영엄마의 마음은 바싹 마른 나뭇잎처럼 겨우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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