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평수는 달라!
영호엄마와 호태엄마는 엄마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학교의 공개수업과 학부모 대상의 교육이 있을 때는 물론 평소에도 잦은 브런치 모임을 만들어 엄마들을 불러 모아 우르르 몰고 다녔다. 그런 분위기의 모임이 불편했던 이들은 한 두 번 그녀들의 브런치 모임에 참석 후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태엄마의 정보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일부 엄마들은 그 브런치 모임이 대단한 정보를 나누는 모임으로 생각하고 열일 제쳐두고 참석을 했다. 시간이 흘러 2학기가 되며 2학기 회장이 새롭게 뽑혔지만 엄마들 사이에서 여전히 리더 역할을 하는 영호엄마와 호태엄마였다.
2학기가 되며 영호네 반에는 새로운 아이가 전학을 왔다. 전학생의 이름은 태훈이로 영호와 같은 아파트에 산다고 했다. 하교를 한 준영이는 새로운 친구 이야기를 하느라 신이 났다.
“엄마, 오늘 우리 반에 태훈이라는 친구가 전학 왔어.”
“그래. 그 친구는 아는 친구 없을 테니 친하게 지내. 심한 장난은 하지 말고! 알았지.”
“네. 엄마 그런데 영호랑은 친하던데. 전부터 아는 친구래.”
“전학 온 친구 이름이 태훈이야?”
“응”
“태훈이는 좋겠다. 전학 온 새로운 학교에 아는 친구가 있어서. 금방 적응하겠네. 그래도 새 친구니까 더 친절하게 대해줘.”
“알겠어.”
하교 후 매일같이 쫑알쫑알 학교 이야기를 들려주는 준영이 덕분에, 반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자연스레 그림이 그려졌다. 전학 온 태훈이도 어느새 완전히 적응한 듯했다. 역시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훨씬 빨리 익숙해지고, 새로운 친구와도 금세 가까워진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친구를 만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그 점이 문득 부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준영엄마는 그렇게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준영이가 다니는 학교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체육대회와 학예회를 번갈아 열었다. 올해는 학예회가 있는 해였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틈나는 대로 선생님과 무대 준비를 한다고 했다. 가끔 준영이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손과 발로 안무 비슷한 동작을 했다.
“준영아, 학교에서 연습하는 거 한 번 해봐. 엄마 궁금하네.”
“안돼! 선생님이 엄마들 그날 오시면 깜짝 놀래켜 드려야 한다고 집에서 하지 말라고 했어.”
학예회 날이 되었다. 11월치고는 따뜻한 날씨 덕에 강당에서 준비하는 아이들과 선생님들, 무대를 보기 위해 모인 엄마 아빠들 모두 편안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한동안 마주치지 못했던 영호엄마를 강당 입구에서 만났다.
그녀는 여전히 밝고, 다정한 얼굴이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준영엄마, 요즘 왜 이렇게 안 보여? 바쁜가 봐.”
“요즘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어요. 스터디카페에 가서 하루 종일 글 쓰거나 책을 보느라요.”
“우와, 멋지다. 무슨 공부인지 궁금하다. 나는 책만 보면 눈이 감기던데...”
잠시 웃음이 오간 후, 준영엄마가 말을 이었다.
“참, 전학 온 태훈이가 영호랑 같은 아파트에 산다면서요? 전학 오면서 영호한테 많이 의지했겠다 싶었어요.”
“태훈이, 원래 사립 초등학교 다녔는데 전학 고민하길래 우리 학교 좋다고 했지. 근데 같은 반이 될 줄은 나도 몰랐네.”
“그래도 영호 덕에 빨리 적응했겠어요. 같은 단지에 살면 아침마다 같이 등교도 하고 얼마나 좋아요. 동도 바로 옆동이라면서요?”
“어, 옆동인데... 평수는 달라!”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준영엄마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을 피했다.
분명 인사말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대화였지만, 그 짧은 한 줄이 공기를 바꿔놓았다.
정적을 남긴 채, 그녀의 시선은 저절로 딴 곳을 향했다. ‘같은 아파트’라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방송에서나 들었던 이야기—평수나 아파트 브랜드로 아이들 사이에까지 서열을 매긴다는 말.
설마 했던 그 말이, 지금 막 내 앞에서, 그것도 어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준영엄마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싶어 순간 귀를 의심했다.
영호엄마와 짧은 대화를 마치고 준영엄마는 자리를 잡고 아이들의 무대를 지켜보았다. 준영이네 반이 준비한 무대는 담임선생님께서 꽤 공을 들여 준비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공연의 완성도도 높아 엄마들은 깜짝 놀랬다. 담임선생님이 원하셨던 깜짝 이벤트가 통했다. 무대에 선 2학년들을 보니 입학 때와 비교해서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또 한해가 지나간다.
학예회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재윤엄마를 만났다.
“준영엄마 왜 이렇게 오랜만이에요? 요즘 바쁘신가 봐요.”
“요즘 새로운 공부를 시작해서, 맘먹고 열심히 하고 있어요.”
“우와 멋지다. 오늘은 시간 괜찮아요? 오랜만에 커피 한 잔 해요.”
“네, 좋아요.”
준영엄마와 재윤엄마는 스벅에서 그간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보니 아이들 참 많이 컷어요.”
“그쵸, 이제 제법 형님 티가 나요. 3학년 되면 울 준영이 12월생 티 좀 벗을까요? 아직까지는 확실이 생일 빠른 친구들 보다 작고 애기 같아요.”
“3, 4학년 되면 그거 하나도 신경쓰이지 않는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 근데 아까 강당에서 제가 이야기를 잘 못 들은 거 같은데... 이걸 물어봐야 할까요? 제가 잘 못 들은 걸로 오해하는 건가 싶어서요.”
“뭔데요? 무슨 이야기 길래.”
“좀 민망한데... 아까 강당에서 영호엄마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 나누다가 전학 온 태훈이 같은 아파트 옆 동이라 아이들 좋겠다고 하니까...어, 옆 동 인데 평수는 달라! 하는거에요. 순간 너무 민망해서,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어요.”
“아닐걸요. 제대로 들은 거 맞을 걸요. 저도 그 말 들었어요. 전에 오랜만에 브런치 모임에 나갔는데 저랑 무슨 말을 하다 그 말을 하는거에요. 그래서 그냥 아, 그래요. 하고 넘겼어요.”
“전 방송에서 애들 사이에서 그런 말이 오간다고만 들었지, 성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니까요.”
준영엄마와 재윤엄마는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들 학교에서 리더 행세를 하며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엄마, 그것도 준영엄마보다 열두 살이나 많은 어른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동안 그녀와 거리를 두고 지내며 불편함은 느꼈지만, 이렇게 인간적으로 실망한 건 처음이었다. 학부모 세계의 민낯이란 게 이런 것이었나—속이 다 보이는 허영과 계급의식. 그 씁쓸함이 입안에 고여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살면서 가장 쓸데없는 관계가 학부모 관계일지도 몰라.’
준영엄마는 그날 이후, 자신이 몰두하고 있던 공부에 더욱 집중했다. 차라리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훨씬 더 유익하고 평화로웠다.
찬바람이 불고 나서야 집 앞 하천에서 풍기던 악취는 잦아들었지만, 그녀에게서는 오히려 감춰져 있던 냄새가 새어 나오는 듯했다. 계절이 정화한 건 하천뿐, 사람의 속내는 오히려 더 진하게 피어났다.